여성고객님은 “여성 특별가격 상품으로 이동”

BLACKYAK HISTORY

산악인과 함께한 40년간의 끊임없는 도전, 히말라야를 넘어 세계로

개척과 모험의 시대 (1945-1972)


개척과 모험의 시대 (1945-1972)


해방의 여명과 등산의 싹

“세계의 자유평화와 함께 조선에도 해방의 날이 오고 건국의 여명을 맞이하였습니다.
삼천리강산에 모든 일꾼은 쓰라리고 오랬던 억압과 패반(覇絆)에서 벗어나서
이제야 자유로운 마음과 힘을 기쁨과 감격으로서
앞날의 건설을 위하여 결집할 때가 왔습니다.”
- 조선산악회 결성취지문 첫머리 -


<1941년 여름등반 연성회를 위해 금강산 장안사에 모인 백령회원들>


945년 9월 15일 조선산악회가 발족했다. 마침내 등산의 역사가 해방과 함께 깃발을 높이 올렸던 셈이다. 도전과 극복의 등산 역사는 그렇게 출발을 하게 되었다. 이때는 다른 분야의 사회단체들이 대부분 활동을 개시하기 이전이었으며, 한국의 사회단체로는 두 번째 결성이었다.
조선의 청년 등산가들은 누구보다도 잰걸음을 걸었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31년 10월 일본인 위주로 창설된 조선산악회의 계승이 아니라, 한국인이 스스로 뭉쳐 만든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 조선산악회는 그 명칭을 한국산악회로 변경했다.
한편, 조선산악회 결성 이전에는 학생산악부가 등산의 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1937년에 창설된 양정고보를 비롯해, 배재학당, 세브란스의전, 보성전문학교 등의 학생산악부가 일제 강점기 속에서 등반 활동을 펼쳤다.
특히, 민족 스스로의 역량 배양과 독립 쟁취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조선의 청년 등산가들은 1937년 10월 순수 조선인들로 구성된 백령회(白嶺會)를 창설했다. 투철한 민족의식을 가진 개척자이자 선각자인 이들은 일본 산악인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개척등반의 경쟁을 펼치기도 했다.

당시 일본 산악인은 마치 독무대처럼 금수강산을 누비면서 민족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그래서 백령회는 학술조사단 형식으로 어렵게 일제의 허가를 받아 백두산 병사봉(2,744m)에 올랐다. 한국의 지붕이라 불리는 개마고원도 등반했는데, 개마고원에는 2,000m 이상의 높은 산이 즐비하다. 또한 금강산(1,638m) 서북릉에 동계 개척 초등을 하기도 했다. 1939년 1월에는 설악산 설중 탐험에 나서 동계 초등을 해냈다.


몽블랑 근대 알피니즘의 탄생


이처럼 한국의 근대적인 등산(登山, Alpinism, Mountaineering)은 그 출발이 서구에 비해 약 150년가량 늦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풍류나 유람으로 유유자적 즐기는 등반, 사냥이나 약초 캐기, 땔감 등을 구하기 위한 생계 등반 정도였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전국을 누비면서 지리를 기록한 일은 특별한 등반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김정호는 1861년에 대동여지도를 세상에 내놓았다.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산악이 많은 지형을 갖고 있다. 국토의 약 70%가 산이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산과 가깝게 지내온 것은 사실이다. 1925년 4월 영국인 공사관 아처(Cliff Hugh Archer)는 페이시(E. R. Pacey)와 그리고 일본인 야마나카(山中)와 함께 북한산 인수봉을 등정했다. 공식기록으로 남아있는 한국의 첫 암벽 등반인 셈이다. 그들은 대나무 장대에 갈고리쇠를 달고 로프 등을 이용해 정상에 올랐으나, 이미 이 땅의 선조들이 남긴 발자취 등을 보면서 놀랐다고 한다. 사람이 쌓은 돌탑 등의 흔적을 보았던 것이다.
유럽에서는 1786년 알프스의 최고봉인 몽블랑(Mont Blanc, 4,807m)을 처음 등정하면서 등산의 개념이 정립되었다. 1760년의 어느 날, 몽블랑 주변에 있는 브레방(Le Brevent, 2,525m) 정상에 스위스의 자연과학자이자 등산가인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Horace Benedict de Saussure)가 올랐다. 그곳에서 저 멀리 보이는 몽블랑의 장엄함은 감동 그 자체였다. 이제까지 아무도 오른 적 없는 신비스러운 산의 정체를 문득 밝히고 싶어졌다. 떠도는 소문에는 악마가 사는 곳, 또는 용이 살고 있다고도 했다. 소쉬르는 “누구든지 이 산에 제일 먼저 오르는 사람에게는 상금을 주겠습니다.”라는 제안을 세상에 내놓았다.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위한 도전은 26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1786년 8월 7일, 15시간의 쉼 없는 전진으로 몽블랑 등정에 성공한 이는 미셸 가브리엘 파카르(Michel Gabriel Paccard)와 포터로 고용된 자크 발마(Jacques Balmat)였다. 변변한 장비나 지도도 없었고 기상 관측도 불가능한 시대였다. 목숨을 건 두 사람의 모험은 근대 등반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초등의 영예를 독차지하기 위한 중상모략이 벌어지고 말았다. 상금을 발마에게 선의로 양보했던 파카르는 등정 의혹에 휩싸였고, 무려 150년 동안 지루한 논쟁에 휘말렸다. 이후 발마의 일기장이 세

세상에 나타나면서 그의 거짓말이 드러났다. 다시 내려와 파카르를 정상까지 끌고 올랐다는 발마의 말은 거짓이었다. 오히려 파카르가 먼저 정상에 올랐던 것이다. 죽어서도 억울했던 파카르는 샤모니(Chamonix) 광장에 동상이 세워지면서 초등의 명예를 되찾았다.
초등 다음해인 1787년, 두 번째로 몽블랑 정상에 오른 이는 바로 소쉬르였다. 무게가 무려 68kg이나 나가는 이불더미를 가져가야 했다. 현재의 침낭 무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이외에도 불을 피우기 위한 장작더미, 대형 천막, 크레바스를 건널 때 사용할 사다리 등을 20명의 짐꾼에게 지게 하는 대규모 원정대를 꾸려서야 등정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알피니즘, 등산이라는 말은 이런 고통과 위험 속에서 탄생했다.
한편,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가장 앞서서 등산의 개념을 도입했다. 불행히도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한국은 외국인 선교사와 외교관, 일본인, 일본에 유학한 동포 등을 통해서 등산의 싹이 조금씩 심어지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조선의 청년들은 스포츠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면서 독립운동의 수단으로까지 발전시켜 나갔다. 아름다운 강산을 보면서 민족정기를 가슴에 품었다. 또한 일본인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렇게 시대의 선각자들은 젊은 기상과 기백으로 개척의 길을 걸었지만, 대부분의 일반 대중들은 근대적 의미의 등산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실정이었다.


<68년 고등학교 산악반의 북한산 등반>


호연지기의 기상과 대중화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약 3년 동안 금수강산은 피비린내로 슬픈 얼룩이 졌다. 전쟁 이후, 폐허와 가난 속에서 다시 등산은 서서히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교와 고등학교에 산악반이 다투어 생기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모습이었다. 당시에는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에 등반하는 학생들의 소식이 사회적 관심을 받아 뉴스거리로 보도될 정도였다. 이렇게 학생들의 호연지기(浩然之氣) 기상은 국민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대학산악부가 갈수록 확산되었으며, 등산동아리 출신들은 졸업 이후에도 OB(Old Boy)산악회 모임을 결성하면서 YB(Young Boy)와 연결되었다. 전국적으로 고등학교는 산악반, 보이스카우트, 하이킹반 등을 두기 시작했고 활동도 왕성해졌다. 1960년 전후부터 일반산악회의 창립이 이어졌으며, 큰 규모의 공장이나 사업체 등에서는 직장산악회가 탄생되었다. 정부의 각 부처와 산하기관에서도 직장산악회를 두기 시작했다. 등산의 대중화가 꿈틀거리면서 명산순례와 자연사랑, 건강증진, 화합도모 등의 수단으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순수하게 알피니즘을 추구하는 산악인과 산악회도 점점 많아졌으며, 취미로 하는 등산을 넘어 록클라이밍(Rock-Climbing)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선진국의 클라이밍 정보와 기술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전문장비도 어렵게 도입되기 시작했다. 북한산의 인수봉과 도봉산의 선인봉이 암벽등반의 요람으로 등장했다. 등산을 대중스포츠화 하려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강해져갔다.
전국대회가 처음으로 개최되고, 초보산악인을 위한 암벽등반강습회, 시민하이킹보급회 등도 개최되었다. 오늘날 서울특별시산악연맹(이하 서울시산악연맹)의 한국등산학교도 이때의 겨울등산학교에서부터 출발했다. 산악운동은 대중화와 함께 전문화를 갈망하면서 발전의 길을 걸어 나갔다.
한편,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모든 유사단체를 통폐합한다는 포고령이 내려졌다. 이러한 정부시책에 의해 새로운 등산단체 결성이 논의되었으며, 마침내 1962년 4월 23일 대한산악연맹 창립총회가 열렸다. 한국산악회는 새롭게 통합된 조직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군사정권의 유사단체 통합 구도에서 벗어났다.




<1959년 암벽등반 교육중인 서울산악회 회원들>


“… (전략) 지금까지 일부 층에서만이 향유하던 특수운동이라는 것을 지양하고,

국민 각 계층에 널리 보급 장려케 하여 범국민운동으로 발전시킨다면

그동안 위축해 오기만한 국민들의 씩씩하고 굳건한 기풍을 새로이 일으키게 될 뿐 아니라,

국가재건을 위해서도 명랑하고 굳센 일꾼들이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산악운동 자체에도 필연적으로 정당하고

건전한 발전에 기여가 될 것이므로… (이하 생략)”


- 대한산악연맹 창립취지문 중에서-



대한산악연맹은 한국 산악계의 양대 산맥으로 새롭게 등장하면서 산악운동을 범국민적 운동으로 발전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대한산악연맹은 1962년 10월에 제1회 전국학생등산시범대회를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개최했다. 중앙청 앞마당에서 개회식을 열었고, 400여 명이 세종로와 종로 거리를 행진했다. 이렇게 정부까지 대국민 산악운동 고취에 힘을 쏟아주었다


한편, 1971년 11월 28일 북한산 인수봉에서는 클라이머들이 강풍으로 인해 서로 뒤엉켜 7명이 동사하고 16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회적으로 큰 충격이었다. 산악 인구는 꾸준히 늘고 있는 것에 비해 안전의식은 부족했다. 이로 인해 서울시산악연맹은 1972년 2월에 산악조난구조대를 창설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산악단체의 산악활동이 구조의 영역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
1950년대 말부터 한국의 산악계는 히말라야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 산악인들의 자존심을 일본이 건드렸기 때문이다. 등산가에게 악명이 높았던 마나슬루(Manaslu, 8,163m)를 일본이 1956년 5월 9일 최초로 등정했다. 정상에서 1시간 동안 머물면서 16mm 무비카메라로 주변 풍경을 담기까지 했다. 8,000m 정상에서 찍은 세계 최초의 영상 기록이었다. 일본 산악인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으며, 일본 국민들에게 전쟁 패망의 아픔과 실망을 떨쳐내고 희망을 주었다.
또한, 1953년 5월 29일 영국의 에드먼드 힐러리 경(Sir Edmond Hilary)이 에베레스트(Mt. Everest, 8,848m)에 최초로 등정한 것도 크게 자극이 되었다. 인간이 달나라에 착륙한 사건만큼이나 당시에는 세계적인 이슈였다. 알프스 등정이 거의 끝나가자 등산의 무대는 히말라야로 옮겨졌던 것이다. 이때까지 에베레스트는 인간에게 정상을 한 번도 내어준 적이 없었다. 에베레스트에 대한 인간의 도전은 1921년부터 시작되었으니 무려 32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힐러리 경은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다보니 정상이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힐러리 경은 공군 조종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고 제대했다. 그는 영국의 탐사대원으로 세계 각지의 고봉들을 등정해갔다. 셰르파였던 텐징 노르가이(Tenzing Norgay)와 함께 그는 세계 최고의 봉우리에 우뚝 섰다. 위대한 산악인 힐러리 경은 영국의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그의 얼굴은 뉴질랜드 5달러 지폐에 새겨졌다.
등반 기술과 장비도 함께 발전해나갔다. 아이젠(Eisen), 카라비너(Karabiner), 피톤(Piton), 아이스피톤(Ice Piton) 등의 용구가 1900~1930년대에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이로써 인류는 7,000m 높이 이상의 고봉에 도전할 수 있었다. 1949년 네팔 정부가 히말라야 원정을 개방하면서 초등정을 위한 경쟁이 치열해졌다.


1950년부터 1964년까지 14년 동안 히말라야 8,000m 14봉에서는 각국의 과학 문명이 총동원되었다. 새로 선보이는 용구와 함께 당시로는 첨단소재였던 나일론으로 만든 텐트, 우모복, 로프, 경금속 소재로 만들어진 경량화 최신 장비 등이 망라되었다.
한편, 한국의 히말라야 최초 원정은 1962년 경희대학교 산악부가 그 첫 테이프를 끊었다. 세계의 지붕으로 향한 그들은 다울라기리(Dhaulagiri) Ⅱ봉을 정찰 등반했으며, 빈약한 장비의 열세를 극복하면서 무명봉(6,700m)을 등정했다. 8월 15일 서울을 출발한 그들은 일본, 태국, 인도 등을 거쳐 8월 31일이 되서야 네팔에 들어갔다. 지금과 달리, 정말 머나먼 길을 지나 거의 두 달 만인 10월에야 등정을 했다. 이들이 장도에 오르기 전 언론은 이렇게 건투와 성공을 빌었다.


“흔히 등산을 ‘스포츠’의 왕이라고 하거니와,

때로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히말라야’에 도전하는 정신과 기술이야말로

 참으로 ‘스포츠’의 왕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용기와 침착 및 정열 없이는 도저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용자의 ‘스포츠’라고 보아야겠다.”
- 동아일보 1962년 8월 8일자 기사 중에서


1969년 2월 13일, 한국산악회가 설악산에서 히말라야 원정 등반훈련을 실시하던 중이었는데, 폭설 뒤의 눈사태로 말미암아 이희성 대장 등 10명의 대원이 죽음의 계곡에서 사망했다. 그야말로 대참사였다. 이 해 5월에는 최초의 산악잡지인 <등산(지금의 ‘월간 산’의 전신)>이 창간되기도 했다. 등산이 보다 대중 곁에 가까이 다가왔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1971년 5월 대한산악연맹의 원정대가 로체샤르(Lhotse Shar, 8,382m) 등정에 실패했으나, 최수남이 8,000m 선을 넘어선 한국 최초의 산악인이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전국합동대도 마나슬루에 도전했으나 김기섭이 추락사하고 말았다.
한편, 1971년 11월 28일 북한산 인수봉에서는 클라이머들이 강풍으로 인해 서로 뒤엉켜 7명이 동사하고 16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회적으로 큰 충격이었다. 산악 인구는 꾸준히 늘고 있는 것에 비해 안전의식은 부족했다. 이로 인해 서울시산악연맹은 1972년 2월에 산악조난구조대를 창설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산악단체의 산악활동이 구조의 영역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



1972년 4월 한국의 원정대는 마나슬루에 또다시 도전했지만 눈사태로 대원 5명과 셰르파 10명을 잃는 대형 사고를 당했다. 어두운 유신체제 속에서 충격적인 뉴스는 계속 이어졌다. 당시 등산은 국력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등산가의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과학적 첨단 기술과 장비, 정보 등이 총동원되어야만 세계의 등산 열강과 어깨를 겨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한국 등산의 역사는 칠전팔기하는 열정을 잃지는 않았다.
반면 국내 등산은 생활화된 스포츠로서 활기를 띠었다. 등산 인구가 1970년에 접어들면서 급증했다. 휴일마다 서울 근교의 산에 몰려드는 등산객을 당국에서는 50만 명으로 추계하였다. 심신을 단련시키는 좋은 스포츠로서 일단 장비만 마련해놓으면 경비가 적게 든다는 것이 붐을 이루는 이유로 분석했다.
당시 신문의 등산 가이드 기사에서는 운동화에 작업복, 도시락이면 간단하게 산에 갈 수 있다고 안내했다. 또한 등산모자는 500원에서 1,500원, 윈드재킷은 1,500원에서 3,000원, 등산화는 800원에서 1만 2,000원까지이며 제화점 맞춤은 5,000원, 배낭은 600원에서 2,000원, 버너는 6,000원에서 9,000원까지 한다고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