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YAK HISTORY

산악인과 함께한 40년간의 끊임없는 도전, 히말라야를 넘어 세계로

동진, 산으로 가다

동진의 나아갈 길

1973년 2월 1일, ‘동진’사가 문을 연 뒤 기성복 장사는 기대만큼 잘되었다. 청년 창업을 한 강태선 사장은 옷을 하나 팔면 얼른 도매상으로 달려가 외상 대금을 치렀다. 어떤 날에는 열 번을 달려가 판 물건 값을 그대로 갚기도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도매상들은 웃으면서 하루에 한번만 오라고 했다. 가게를 비워두면 손님을 놓치지 않겠냐며 오히려 걱정을 해주었다.
그러다 도매상에서는 이제 이틀에 한 번씩만 와도 괜찮다고 하였다. 적은 자본으로 시작한 강태선 사장은 부지런히 팔고 돈이 수중에 들어오면 즉시 외상값을 해결했다. 도매상들은 젊은 사람이 기특하다면서 외상으로 물건을 주는 양을 점점 늘려주었고, 갚을 말미도 더욱 길게 해주었다.
그렇게 형편이 점점 좋아지면서 그는 자신감도 많이 붙었다. 어느 날, 그는 도매상에서 물건을 가져오지 않고 직접 옷을 만들면 이윤이 더 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무릎을 쳤다. 미국에서 들여오던 청바지를 만드는 곳이 없으니 해볼 만한 일이라고 떠올렸던 것이다. 미제 청바지는 주로 고아원이나 양로원 등에 구호물자로 들어왔는데, 상태가 좋은 청바지는 시장에 흘러나왔다. 몸에 짝 달라붙는 미제 청바지는 주로 대학생에게 인기 품목이었다.
강태선 사장은 대구에서 원단을 만드는 사람을 알게 되어 미제 청바지를 샘플로 건네주었다. 얼마 후에 대구에서 만들어진 국산 청바지가 서울로 올라왔다. 비싼 미제 청바지와 가격 차이가 컸기 때문에 만들어진 국산 1호 청바지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그런데 나중에 문제가 발생했다. 국산 청바지 원단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몇 번 빨래를 하고나면 옷이 줄어들어 입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참으로 웃지 못할 결과였다.
당시 소비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크게 내세우지 않았기에 별 타격은 입지 않았으나, 젊은 강태선 사장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제대로 되지 않은 물건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렇게 해서 돈은 많이 벌 수 있겠지만, 돈을 쫓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옷 장사에 대한 회의감도 들었다. 앞으로 내가 가야할 방향이 이것인지도 의문이 들었다. 이때부터 그는 미래지향적인 사업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어느 날, 강태선 사장은 종로5가 등산장비점이었던 영삼사의 강영삼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강태선 사장에게 권했다.
“옷만 팔아서야 되겠어. 나처럼 등산장비를 만들어보지 그래?”
강태선 사장은 눈이 번쩍 뜨였다. 옷 장사는 겨울에 잘되었는데, 여름에는 손님이 많지 않은 편이었다. 한편, 등산장비는 여름에 장사가 잘되었다. 그가 그렇게 좋아하는 산이었으며, 국내 등산장비의 열악함에 탄식했던 터라, 앞으로의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종로5가는 유명한 군수물자 골목이었다. 군수물자는 등산장비로 둔갑되어 팔리고 있었다. 등산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군용 항고(일본어로서 반합)와 군화, 배낭 등을 사갔다. 변변한 장비가 없던 시절이라 ‘산꾼’들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배낭과 텐트를 짊어지고 산으로 갔던 것이다. 등산장비는 군용이 아닌 것이 거의 없었다.
민간인의 군수품 사용이 너무 심해지자 정부는 1960년대부터 군수품 사용 금지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등산장비가 시중에 없어 군용 제품들의 거래는 끊이질 않았다. 의류와 간단한 장비의 경우에는 소규모 제조업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960~70년대 군용텐트>

공휴일이 되면 종로5가 버스정류장에는 각양각색의 장비를 갖춘 등산객들로 붐볐다. 때로는 그 일대에 혼잡이 일어날 정도로 몰려들었다. 이곳은 산으로 가는 교통 요지였다. 등산 인구의 증가는 국민 건강을 위해 매우 좋은 현상이었다. 어느새 등산 인구는 200만 명에 이르렀다. 1973년 3월 11일부터 경찰은 버너 없이 코펠 등의 취사도구를 갖고 등산하는 것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산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산림을 훼손시키면서 장작으로 사용하는 세태를 막기 위함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산 위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이제 강태선 사장은 의류를 절반으로 줄이고 등산장비를 들여놓았다. 이때부터 일반 등산객은 물론이고 전문적인 산악인들과 얼굴을 조금씩 트게 되었다. 등산장비의 구색도 점점 갖춰나갔다. 그는 등산장비를 최초로 국산화시키면 제대로 된 사업이 될 것이라고 확신을 가졌다.


궤도에 오르다

1970년대 초반, 국산 등산장비는 산사람들이 생명을 걸고 믿고 사용하기에 너무나 빈약한 수준이었다. 저질 등산장비 등으로 말미암은 산악사고도 자주 일어나 문젯거리가 되었다.
시중의 텐트는 물이 새고 통풍이 잘 안되어 성에가 얼어붙는 것은 보통이었다. 등산화는 방수가 미흡해 왁스를 발라 물이 배어드는 것을 막는 형편이었다. 실제로 산악부 대원들이 동계 등반 시에 동상을 많이 입기도 했다. 국산 카라비너의 경우는 대장간에서 마구 만든 것이어서 힘을 주면 늘어나버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자일의 경우에도 낙하산 줄을 엉성히 엮어 짠 출처가 확실치 않은 것도 많이 돌아다녔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등산 인구는 나날이 증가되어갔다. 신문에는 등산안내와 함께 낚시안내 코너가 운영될 정도였다. 즐길 수 있는 여가의 종류도 별로 없었던 시절이다. 신문에는 가는 곳과 날짜, 시간, 회비 등이 게재되었다. 산악회나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관광버스회사 등에서 단체로 산행을 주선했다. 서울 관악산은 회비가 500원, 강화도 마니산은 1,000원, 양평의 용문산은 1,300원 정도였다. 낚시 회비는 대부분 1,200~1,500원 정도였다.
1974년, 창업 첫해를 지나가자 ‘동진’사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갔다. 그는 원활한 사업 활동을 위해 매장에 전화를 설치했다. 전국적으로 전화 공급량이 수요에 훨씬 미달해 회선이 절대 부족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전화 가입을 하려면 막대한 거금이 소요되었다. 또한 전화는 판매가 금지된 청색전화와 자유로이 사고 팔 수 있는 백색전화로 나뉘어져 있었다. 백색전화는 시중에서 약 100만 원 정도에 거래될 정도로 폭등되어 있었다. 전화기의 색깔이 하얀 것이 아니라 등록원부가 하얀 색이라 백색전화로 불렸다.
강태선 사장은 사업장에 백색전화를 놓고 너무나 뿌듯했다. 아무나 놓지 못하는 귀한 전화를 보유해 마치 날개를 단 기분이었다. 266-3493(1999년 1월 1일부터 국번이 네 자리로 바뀌어 2266-3493), 이 번호는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 번호를 종로5가에 있는 첫 매장에서 지금도 그대로 씁니다. 옛 고객들이 지금도 그 번호로 전화를 하세요. 30년 전에 브라질로 이민을 가셨다는 분이 몇 년 전에도 그 번호로 전화를 주셨어요. 그 고객과 함께 저는 옛날이야기를 나누면서 추억에 빠지기도 했었죠.”
또, 몇 년 전의 어느 늦은 밤이었다. 미국에서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오래 전에 이민을 간 교민이 한국에서 산을 다니던 때의 추억이 생각나 전화기를 들었단다. 일부러 연락한 그 교민과 함께 강태선 사장은 이야기꽃을 한창 피웠다. 카라비너와 피켈, 귀한 수입 버너와 배낭 등 등산용품이 동진에 제일 많았던 이야기며, 이탈리아제 피켈이 너무 비싸 만져보고 돌아섰던 안타까운 옛날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이렇게 동진에 서린 고객들의 추억은 걸어온 등산 역사의 깊이만큼 많은 이야기가 아직까지 숨 쉬고 있다.
한편, 청년 강태선 사장은 바로 옆 점포도 새로 얻어 확장을 하게 되었다. 2평에서 4평으로 늘어났다. 한쪽은 매장이었고 한쪽은 미싱(일본어로서 재봉틀) 3대를 갖춘 공장이자 그의 숙소였다. 별도의 집도 없이 그 곳에서 모든 생활을 했다. 공장에서는 간단한 것들을 직접 생산했다. 당시에는 전문 등산의류는 거의 없었고 주로 야영장비였다. 우리 등산의 대중적인 시작은 캠핑이었던 셈이다. 전문 산악인은 그 숫자가 미미해 전문적인 장비를 취급하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동진산악의 이름으로

1975년 4월, 신접살림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강태선 사장은 보다 더 의욕적으로 사업에 임하게 되었다. 식구가 생겼으니 더욱 열심히 하리라 스스로 마음을 다졌다. 하지만 의류를 취급하면서 부도났던 어음 때문에 많은 고민이 되었다. 앞으로의 사업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뇌했다.
결국 그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약 2년 만에 상호를 ‘동진’사에서 ‘동진산악’으로 바꾸어버렸다. 등산장비에 보다 더 주력하기로 했던 것이다. 동진산악이라는 상호에 걸맞게 등산화와 배낭, 코펠, 버너 등을 단번에 80만 원어치나 구입해 물건을 들여놓았다.


<등산장비 수입을 위한 일본 출장>

전문적인 등산장비도 어렵게 갖추었다. 정식으로 수입해야 했는데, 그 길이 만만치 않았던 시절이라 보따리상을 많이 이용했다. 보따리상은 구입한 의류를 입을 수 있을 만큼 켜켜이 껴입고 보따리에 나머지 물건을 담아 뒤뚱거리면서 세관을 통과했다. 주로 일본에서 들여왔는데 강태선 사장이 직접 사오기도 했다. 일명 ‘뺀뺀이창’으로 불리는 외제 평창 암벽화 같은 귀한 제품도 들여놓았다. 또 사온 수입제품은 뜯어보고 공부하면서 제품을 만드는 데 응용하기도 했다.
한편, 강태선 사장은 등산장비 중에서 제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배낭을 제일 먼저 생산했다. 비록 작은 공장에서 만든 것이었지만 우리 체형에 맞도록 개량한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당시 미군이 쓰던 배낭은 굉장히 불편했다. 등판 부분이 맞지 않아 1시간만 메고 다니면 어깨의 살이 벗겨져 쓰라렸다.
그는 미군 배낭을 해체해 다시 디자인하면서 시제품을 만들었다. 미싱사의 손으로 건너가 제작된 배낭이 일명 삼대배낭이었다. 삼대배낭은 양쪽에 호주머니가 달렸는데 국산 배낭 1호인 셈이다. 삼대배낭은 20ℓ, 25ℓ, 30ℓ, 38ℓ로 네 종류였다. 가격은 800원에서 1,500원 사이였다. 써본 사람들은 좋다고 평했는데 대박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신기하게 생겼다고 한번 써보겠다는 산악인은 많았다. 물론 공짜로 지원해달라는 말이었다.
배낭에 이어 우의, 침낭, 코펠, 버너, 텐트까지 만들어나갔다. 1977년에는 용품의 구색이 거의 완성되었다. 버너는 깡통을 망치로 두들겨 펴서 모양을 만들고 삼발이를 붙인 뒤에 연료통에 심지를 넣는 식이었다. 로프는 배에서 쓰는 밧줄을 구해 얇게 나눈 뒤에 꼬아서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악한 형편이지만 국산 제품들은 이런 과정 속에서 탄생되었다.
종로5가에서 등산장비 전문점으로 새롭게 각인된 동진산악은 여름 장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7~8월에 수요가 대거 몰려있었기 때문이다. 휴가철을 맞아 배낭과 코펠, 텐트가 날개를 달고 팔렸지만, 이 시즌이 끝나면 많이 팔리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다른 계절에는 기성복을 취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등산장비 전문점으로 가닥을 잡은 기본 방향에는 변함이 없었고, 좋은 제품으로 발전하기 위한 개발 노력에도 계속 공을 들였다. 왜냐하면 등산의 길은 필연적으로 발전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 1975년 9월에는 중학교 동창이자 친구인 월남 참전용사 이철남이 제주에서 올라와 직원으로 합류했다.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살뜰히 사업을 돕게 되었다. 사촌동생과 처남도 일을 거들었고 직원은 어느새 6명으로 불어났다.

<1972년 백운대 산장으로 가는 등산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