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야크
패밀리 브랜드
밝고 생동감 넘치는 Play Outdoor 프리미엄 키즈 아웃도어 브랜드입니다.
젊고 혁신적인 스타일의 미국 프리미엄 아웃도어 브랜드입니다.
미국 포틀랜드에 본사를 둔,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는 도시형 기술 캐주얼 브랜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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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정통 엔트리 아웃도어 브랜드입니다.

BLACKYAK HISTORY

산악인과 함께한 40년간의 끊임없는 도전, 히말라야를 넘어 세계로

비범한 자이언트

전국구 도매상으로 첫발을 떼다

개조한 군용품과 드물게 외제품을 취급하면서 동진산악은 제대로 된 국산 등산용품을 만들겠다는 오기로 꾸려나갔다. 당시 사람들은 “동대문에 간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는 종로5가에 간다는 말이었다. 등산장비를 구할 수 있는 곳은 남대문과 종로5가였다. 남대문은 대중적인 일반 제품이 주를 이루었고, 종로5가는 보다 전문적인 등반장비까지 취급하고 있었다.
특히 종로5가는 산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도봉산이나 북한산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이 이곳에 주로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약속 장소였으며 기다리면서 제품을 구경하는 일이 잦았다. 하산 후에는 모임 장소로도 애용되었다. 종로의 소문난 먹자골목도 사람을 끄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또한 1970년 7월 7일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동대문종합상가 일대에 동대문고속버스터미널이 생겼기 때문이다. 각 지방에서 올라온 소매상들이 집결하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자연스럽게 도매상들이 많아졌으며, 소매상들도 돈을 번 사람들이 꽤 많았다.
서울운동장 역시 큰 역할을 하였다. 서울운동장은 1984년 9월에 잠실종합운동장이 개장하면서 동대문운동장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우리 근대와 현대 역사에 있어서 스포츠의 메카 노릇을 한 곳이 바로 서울운동장이었다. 1926년 3월에 준공된 서울운동장은 고교야구 경기 때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대통령배 축구대회나 국가대표 A매치 축구를 보기 위해 북새통을 이루었다. 야간 경기도 치를 수 있는 국제 규모의 유일한 종합경기장이었다.
동대문운동장에는 다양한 스포츠용품점이 줄지어 입주하고 있었다. 전국을 상대로 하는 스포츠용품 도매상도 물론 많았다. 동진산악의 강태선 사장은 스포츠의 메카인 이곳에 진출하고 싶었다. 전국을 누비는 도매상으로 좀 더 통 큰 사업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닿을 연이나 줄이 없어 고민했지만, 일단 가서 부딪히기로 결정했다. 무작정 동대문운동장의 수많은 체육사를 찾아다닌 청년 강태선 사장은 거래를 뚫기가 만만치 않았다. 어쩌다 거래가 되어도 조건이 나쁘고 물건 양도 아주 미약했다. 그는 할 수 없이 아침마다 동대문으로 출근했다. 동대문의 체육사 앞에서 빗자루를 들고 열심히 쓸었다. 점포 앞에서 빗질을 하는 그를 지켜본 체육사 사장들은 처음엔 청소하는 사람이거나 근처 체육사의 직원으로 알았다. 나중에 종로5가에서 온 젊은 사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보다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젊은 청년이 열심히 일하려는 의욕을 보인다며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제가 등산장비점을 하는데 판로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전국 각지에 체육사들이 많이 생기고 있는데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방의 체육사들을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운동용품만 취급할 게 아니라 등산용품도 같이 판매하면 좋지 않겠어요.”
이렇게 해서 각종 운동구나 운동용품을 팔던 체육사는 등산장비도 취급하게 되었다. 신광사, 한일스포츠, 동대문스포츠, 대한체육사 등 유명한 체육사들이 하나둘 협조해주었다. 그들은 지방에 새로운 체육사가 오픈하면 꼭 등산장비를 같이 취급할 것을 권해주었다. 체육사가 100만 원어치 물건으로 오픈을 한다면, 10만 원 어치는 등산장비로 구색을 갖추도록 유도했다. 지방의 체육사 납품 대금은 동대문 체육사에서 결제를 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동진산악의 제품은 전국구로 변모하고 있었다. 새로 오픈한 체육사가 등산장비를 취급하자, 기존의 체육사들도 등산장비를 갖추는 방향으로 점점 따라오게 되었다.



<(좌)1980년대 초 서울 종로5가 지역 등산·레저장비점>

<(우)1980년대 초 서울 남대문 지역 등산·레저장비점>

자이언트가 일어나다

동대문운동장의 체육사 사장들은 젊은 강태선 사장을 한 모임에도 가입시켜 주었다. 이름하여 한국운동구친목회(제조업체의 모임, 이하 한운회)였다. 강태선 사장은 이 모임에서 많은 운동용품 제조업자들을 사귈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이 재산인 법이라 큰 도움을 받았다. 한운회에 이어서 전국운동구친목회(판매업체의 모임, 이하 전운회)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이곳은 운동용품 도매상들의 모임이었다. 한운회와 전운회를 통해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생산업자와 유통업자들을 모두 상대할 수 있었다.
이런 토대 속에서 동진산악은 전국의 체육사와 문방구, 가방점을 대상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당시에는 동네마다 체육사가 매일매일 늘고 있었으며, 문방구는 학교 주변에 꼭 있는 필수 요소였다. 비록 규모가 작더라도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자랑하게 되었다. 등산용품을 진열해 팔도록 하니 매출 규모는 나날이 늘어났다. 그리고 시장에는 꼭 가방점이 하나둘 이상은 있었는데 이런 곳들도 뚫고 나갔다. 가방 옆에 등산 배낭이 자연스럽게 진열되도록 했던 것이다.
또한 등산처럼 인구가 늘고 있는 낚시 쪽에도 문을 두드렸다. 낚시점에도 등산용품을 두도록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낚시 분야에서는 종로5가 제일낚시 사장의 도움을 크게 받았는데 그는 수원 제일낚시 사장의 3남이었다. 10형제 중에서 6형제가 낚시 도매상과 수입상을 하는 집안이었다. 남대문이든 동대문이든 낚시 바닥에서는 알아주는 대단한 일가였으며, 동원 가능한 자본력도 엄청난 제법 큰손이었다. 그는 강태선 사장이 자신과 성씨가 같다는 이유로 친척처럼 대해주었다. 그의 도움으로 인해 전국의 낚시점에 동진산악의 물건이 유통되었다. 그리고 낚시업자 모임에도 불러내 가입시켜주는 호의까지도 베풀어주었다.
1976년, 동진산악은 이제 전국 도매상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창업 3년 만에 무서운 속도로 컸던 것이다. 하지만 일은 더욱 고단해졌다. 아침 8시에 열던 매장도 6시로 앞당겨졌다. 하루가 더욱 길어진 셈이었다. 강태선 사장은 변함없이 직원처럼 막일을 같이 했다. 아침에는 반드시 직접 문을 열었으며 수많은 물건을 나르면서 땀을 뻘뻘 흘렸다. 저녁에는 주문받은 제품을 미리 포장하고 아침 일찍 각지로 출발할 수 있게끔 준비해야만 했다.
전국 도매로도 자신감이 붙은 강태선 사장은 어느 날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너무 피곤해 쌓여있는 포장더미 속에 몰래 뒤엉켜 있다가 눈을 비비며 나온 직원도 있었다. 그 좁은 매장에서 가끔씩 술래잡기처럼 어렵게 직원을 찾아야 할 때도 있었던 재미난 시절이기도 했다.
그는 전국적으로 우리 제품이 깔리는데, 그럴듯한 이름이 있어야 되겠다고 말을 꺼냈다. 즉, 우리 상표가 필요한 때라는 뜻이었다. 외국의 유명한 상표들을 보면서 부러웠는데, 동진산악이 등산장비를 대강 만들어 팔 것이 아니라 상표를 달아 제 이름값을 하자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제 상표 하나를 가질 만한 위치가 되었다는 경영자로서의 꿈과 포부를 세세히 밝혔다.
며칠 뒤에 강태선 사장은 직원들과 논의한 끝에 상표를 정했다. 동진산악의 첫 번째 브랜드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이름은 바로 ‘자이언트(GIANT)’였다. 등산장비 업계에서는 상표에 대해 별 생각이 없던 그런 시절이었다. 한마디로 상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시대였다. 자신의 상표를 가지겠다는 생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시대를 앞서나간 발상이었다.

<동진 자이안트 상표등록>


자이언트는 말 그대로 거인으로서 힘이 넘치는 브랜드였다. 신화나 전설 또는 동화에 나오는 비범한 거인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담겼다. 신비로우면서 몸집이 거대한 힘 있는 기업의 미래를 꿈꾸었던 셈이다. 또한 자이언트는 제임스 딘이 마지막으로 남긴 영화의 제목이기도 했다. 그런데 시대적으로 상표등록의 중요성이 알려져 있지 않은 안타까운 때였기에 상표를 소유하지 못했다. 상표를 관리하는 관청인 특허청도 1977년 3월에야 신설될 정도였다. ‘자이언트’로 이름이 붙은 동진산악의 제품은 1976년 여름 시장에 첫선을 보였다. 이후, 1983년 3월에 ‘동진 자이안트’ 를 출원했으며, 1984년 2월 14일에 상표등록을 마쳤다.

배포 그리고 코오롱 원단의 배낭

1976년 늦여름 무렵, 동진산악은 코오롱 원단을 저렴하게 대량 구매할 수 있는 우연한 기회를 얻었다. 40년 아웃도어 역사를 지켜낸 두 토종기업의 희한한 인연이었다. 코오롱은 한국나이롱에서 만든 나일론 실과 원단의 상표였다. ‘코리아 나이롱(나일론의 당시 표기)’이란 말을 줄여서 만든 상표가 바로 코오롱(KOrea+nyLON)인데 나중에 그 인지도 때문에 회사 이름으로 쓰이게 되었다. 한국나이롱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정부시책 사업으로 미국의 AID(국제개발처) 차관을 들여와 설립된 회사였다.
1973년 2월 1일, ‘동진’이 아웃도어 업계에 발을 처음 들여놓았을 때, 굴지의 대기업 중에 하나인 코오롱도 아웃도어 업계에 처음 진출했다. 원단 제조의 범위에서 그 사업을 더 확장했던 것이다. 코오롱그룹의 모태인 삼경물산이 1973년 7월에 ‘코오롱스포츠’라는 브랜드를 내걸었다. 지금은 코오롱인더스트리가 이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1970년대에는 원단을 제조하는 회사보다 원단을 취급 및 유통시키는 총판들이 힘이 더 좋았다. 시장마다 총판이 최소한 한둘씩은 있었다. 자금력이 좋은 총판이 선불로 돈을 지불해주면 공장에서는 실을 구매해 원단을 짰다. 그래서 선불을 지급할 능력이 없거나 큰돈을 지불하지 못하는 곳들은 비싼 가격으로 원단을 공급받았다. 즉 사람마다 가격이 달랐던 것이다. 또한 일정한 양을 공급받을 수도 없었다. 특히 코오롱 원단은 대기업 제품이라 믿을 수 있었지만, 가격이 비싼 편이라 찾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자이언트 배낭>


그런데 강태선 사장은 감당하기에 벅차 보이는 많은 물량을 가져왔다. 총판에서도 제법 놀란 눈치였다. 동진산악 직원들은 서로 수군거렸다. “뭘 믿고 원단을 저리 많이 가져오지. 넣어둘 창고도 따로 있어야겠는데, 통이 커도 너무 큰 거 아냐. 똥배짱이 있는 건지, 오기를 너무 부린 것 아니야. 돈도 어마어마하게 들었을 텐데….”
강태선 사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새로운 배낭 제작에 매달렸다. 오로지 품질 향상만이 목표였다. 기존에 나온 배낭은 주로 면 소재로 많이 만들어졌다. 얇은 면 소재 위에 재생비닐 코팅을 입혀 방수 처리를 해서 방수도가 약한 편이었다. 또한 사용하다보면 코팅이 쉽게 벗겨졌으며, 물이 빠지는 단점도 있었다. 그런데 코오롱 원단은 나일론이라 기능적으로 더 우수했다. 결국 보다 좋은 배낭이 제작 및 출시되었다.
원단을 싸게 구입했기 때문에 배낭 가격은 별로 올리지 않아도 될 만큼 경쟁력을 가졌다. 가격은 그대로인데, 품질은 몰라보게 개선되었다. 한마디로 싸고 질 좋은 배낭이 진열되었다. 그렇게 해서 많은 배낭이 생산되었는데, 갑자기 시중에는 배낭 원단의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원단이 없어서 배낭을 못 만드는 곳이 많아졌다. 동진산악은 원자재 공급에 아무런 차질 없이 제품을 생산했다.
배낭의 원단 공급이 안정적으로 뒤바뀔 무렵에는 창고에 쌓인 코오롱 원단을 처분했다. 강태선 사장은 원단 공급이 더 어려운 지방으로 보냈다. 당시에는 부산이나 대구에서도 배낭을 생산하는 곳들이 있었는데, 부산의 한 업체에 코오롱 원단을 넘겨주었다. 물론 살 때보다 비싸게 팔아서 이익을 보았다. 우연한 기회에 원자재 대량 확보로 말미암아 좋은 제품을 선보였고 매출 신장에도 추진력을 받았던 셈이다.

<동대문시장의 등산장비점>


강태선 사장은 배포와 오기가 있는 인물이었다. 등산장비 중에 군수품을 주로 남대문시장에서 공급받았는데, 주요 거래처가 N산악센터였다. 제법 거래를 유지해온 관계임에도 가격을 잘 낮춰주지 않았다. 이만큼 많이 사는데 오늘은 가격을 좀 낮춰달라고 할 때마다 면박을 받았다.
1975년 봄의 어느 날, 강태선 사장은 평소보다 많이 구입하는데도 가격이 요지부동인 상대 때문에 오기가 발동했다. 동진에서 동진산악으로 거듭나기 위해 많은 품목이 필요한 때였다. 다시 이만큼 더 구입할 테니 조금만 가격을 양보해달라고 말했다. 이번에도 상대방은 들은 채 만 채 딴청을 피우는 자세였다. 강태선 사장은 구입단가를 낮추고 싶은 심정에 더욱 많은 물량을 요청하다가 이제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오늘 80만 원어치를 살 테니 가격을 이만큼까지 낮춰주세요. 이제는 되겠죠?”
강태선 사장의 말에는 힘이 묻어났다. 남문산악센터 사장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당시에는 연탄 한 장의 가격이 27원으로 연탄 약 3만 장에 해당하는 가격이었던 셈이다. 결국 강태선 사장은 원하는 가격에 물건을 잡아왔다. 하지만 거금이 한꺼번에 소요되는 바람에 후유증을 겪었다. 그는 서울 역삼동 예비군사격훈련장 건너편에 허름한 땅을 계약했는데, 잔금으로 준비한 돈까지 모두 쏟아 부어야만 했다. 잔금을 다시 마련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1평에 2만 원이었던 그 땅은 지금의 역삼동 차병원 뒤편이었다.


지역 관리의 기초와 묘수

동진산악의 대부분 직원들은 강태선 사장의 집에서 숙식을 하였다. 젊은 직원들이 홀로 자취하게 되면 끼니라든가 여러 가지 불편이 따르거나 건강을 해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부인인 김희월 여사는 밥집을 운영하는 것처럼 많은 준비와 가사노동이 따르게 되었다. 따로 방을 얻을 형편이 못되는 직원에게 숙식 제공은 큰 힘이 되었다. 이런 편의 제공을 위해 묵묵히 지원하는 한 여성의 노동은 쉴 새가 없었다. 그야말로 성공을 위한 내조는 빛이 나지 않았지만, 여러 사람들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는 근간이 되었다.


<강태선 사장 부부>


한편, 강태선 사장은 직원들과 함께 출근해 항상 손수 문을 열었다. 직원에게 맡길 법도 한데 절대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식사도 같이하고 물론 회식도 같이했으며, 늦은 시간에 퇴근도 함께했다. 새벽까지 술을 먹는 일이 생겨도 반드시 새벽 6시면 직접 문을 열었다. 피곤한 직원들은 놀라운 체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체력은 틈틈이 산에 오르는 것으로 유지되었다. 힘을 쓰는 일을 직원들과 같이해도 뒤지는 법이 결코 없었다.
동진산악의 제품이 전국적으로 유통되자 영업 관리의 어려움도 많아졌다. 동대문의 체육사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거래하는 경우도 점점 늘어났다. 도매상으로 성장할수록 거래처 관리가 만만치 않았다. 체육사, 문방구, 가방점, 낚시점 등 그야말로 거래처도 가지가지였기 때문이다. 소규모 상인은 물론 대규모 상인들도 대금 결제에 있어서 문제를 일으키는 일도 다반사였다. 여러 곳의 거래처가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어 수금 때문에 지방 출장을 가는 일도 잦아졌다.
강태선 사장은 1976년 11월 말에 첫딸을 얻고 난 뒤 더욱 열심히 일했다. 1977년이 되면서 지방으로 발걸음 하는 일로 분주함은 가중되고 있었다. 광주시에 한번 내려가면 그의 거래처가 무려 50군데였다. 일일이 만나면서 이야기 나누고 수금하며 보내려면 며칠이 소요되었다. 다른 지역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이런 식으로 가면 영업을 담당하는 직원이 많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형편이 허락하지 않아 우직하게 직접 발로 뛸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에게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곤 광주시 금남로의 빅토리아체육사 손민우 사장에게 전화를 넣었다. 연배로 보나 규모로 보나 그 지역에서는 리더인 인물이었다. 광주지역 체육사 친목모임도 주관을 하는 그에게 모임이 있는 날을 알아내 찾아갔다.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별도로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기막힌 생각이었다. 약 50군데가 단 한 군데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저녁 식사비를 동진산악에서 대신 지급 처리했다. 식사대금은 쉽게 20만 원을 넘어섰다. 출장에 따르는 비용과 시간이 대폭 절감되니 그래도 할만한 일이었다. 체육사 업자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까워지고 수금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묘안이었다.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빅토리아체육사에서 모임 날짜를 알려주게 되었다. 그들과 같은 회원인 것처럼 편안하게 대해주었다. 그런데 광주에 내려간 강태선 사장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손 사장은 약 50군데 회원들이 동진산악에 지급해야 할 돈을 자신의 장부에 기재하고 어음을 한 장으로 대신 끊어주었다. 그의 세심한 배려가 너무나 감사했다. 자신이 귀찮게 그런 수고를 할 필요도 없는데도 나서서 도와주었다. 그들에게 일일이 돈을 받아야 되는 귀찮은 일을 자청했던 셈이다. 그는 젊은 친구가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하는 일이니 괘념치 말라고 했다.
강태선 사장은 도매상으로서 지역 및 영업 관리에 어떻게 임해야 하는지 크게 배우는 계기였다. 지역별로 포스트가 존재하도록 모임이나 인물을 곁에 잘 두면 많은 도움이 된다는 법을 깨달았다. 그리고 한 배를 타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뭉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터득했다. 또한, 믿음과 인간관계, 신용이 사업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재인식하고 최우선으로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빛과 그림자

동진산악은 전국을 상대로 도매상을 하면서 지방의 운동용품 도매상들로부터도 위와 비슷한 도움을 얻게 되었다. 한운회는 야구공, 축구공, 배구공, 각종 라켓 등을 생산하는 제조업체 모임이었고, 전운회는 이를 유통시키는 전국 유통채널인 도매상 모임이었다. 두 곳 모임에 다니다보니 자연스럽게 같은 업계 사람으로 대접받거나 또는 형님과 동생처럼 친숙해졌다.
그런데 어느 날, 부산지역의 도매상에서 이렇게 그냥 내려오지 말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즉, 사업을 하다보면 현금이 있을 때가 있고 없을 때도 있는데, 무작정 내려오면 빈손으로 돌아가기가 십상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후, 어느 정도 업계 형편이 괜찮다 싶으면 그쪽에서 먼저 연락을 주었다.
이후, 각 거래처마다 적은 금액이라도 헛걸음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나중에는 한 곳에서 대표로 100만 원짜리 어음을 끊어주는 편의도 제공받았다. 또 현금이 여유가 있으면 입금을 받는 방법도 해주었다. 젊음은 그에게 장점이자 무기였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좋게 보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비치는 섭리는 경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각 지역의 여러 사람들에게 이렇게 많은 도움과 호의를 받았지만, 이와 정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특히 1977년에는 온갖 일들을 유난히 많이 겪은 편이었다.
남원에 한국체육사라는 곳이 있었는데, 어느 날 재고만 쌓이다 부도가 났다고 했다. 나중에 벌어서 갚겠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권력의 배경을 자랑하는 사람이라 더욱 믿기지 않았다. 결국 강태선 사장은 큰 배낭을 메고 내려갔으나 그의 꽁무니는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집으로 찾아가 마당에 텐트를 쳤다. 며칠이 지나자 마침내 그 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절반만 내주겠다고 하였다. 나머지는 차차 해결하겠다고 말했는데 믿을 수 없었다. 그래도 할 수 없이 절반만 해결하고 올라왔다. 과연 나머지는 흐지부지 넘어가버렸다.
한번은 광주산악이라는 곳과도 동진산악은 나쁜 인연으로 귀결되었다. 어느 날 밤새 보따리를 싸서 도망을 가버렸다. 연이은 부도 사태 때문에 동진산악도 자금 운영이 너무 어려운 형국이었다. 어디로 찾아가야 할지도 막막하기만 했다. 그때 번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강태선 사장은 동사무소로 찾아가 그의 이름을 대면서 “제가 이번에는 언제 예비군훈련이 나오죠?”
예비군훈련 날짜에 분명히 그는 나타날 것으로 예측되었다. 드디어 예비군훈련장에서 그를 잡았는데, 황당하게도 그자는 그의 쌍둥이 형이었다. 쌍둥이라니 정말 당혹스러운 결과였다. 결국 쌍둥이 형을 일주일 동안이나 어렵게 설득했다. 야반도주한 광주산악의 사장은 다른 곳에 창고를 몰래 마련해놓고, 그곳에 물건을 쌓아두고 있었다. 절반 정도는 이미 팔아먹은 상태였다. 속상했지만 이 정도로 해결된 것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강태선 사장은 기발한 기지와 끈질긴 인내력으로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동진산악의 직원들 월급도 주어야 하고, 그에 딸린 식구들도 곤궁함을 당하지 않게 하겠다는 책임을 위해 독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이런 고통 속에서 동진산악은 수차례 부도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 고비를 넘기기 위해 전세금을 빼서 해결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집의 아내와 갓난아기는 그런 통에 전세에서 월세로 고생을 겪기도 했다.
한편, 동진산악은 매장과 공장을 같이 운영하기에 공간이 갈수록 협소해졌다. 그래서 강태선 사장은 1977년부터 종로5가 뒤쪽 건물에 공간을 하나 얻어 공장을 분리시켰다. 매장과는 거리가 동대문 방향으로 약 150~2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로써 매장은 더욱 넓어졌고, 공장도 직원이 늘면서 등산장비의 생산량을 더 늘릴 수 있게 되었다. 공장은 창고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또한, 공장에서 나오는 품목도 이제는 다변화 체제가 어느 정도 구축되었다. 봄부터 열심히 생산해 여름 성수기를 대비했다. 수입 전문장비의 진열도 훨씬 많아져 입소문이 난 동진산악은 전문 산악인들의 발길이 더욱 잦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