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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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YAK HISTORY

산악인과 함께한 40년간의 끊임없는 도전, 히말라야를 넘어 세계로

고도성장의 시대 (1973-1989)


등산 인구, 경제성장률을 앞지르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등산 인구는 나날이 많아졌다. 봄과 가을뿐만 아니라, 이제 여름 등산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휴일마다 산을 찾는 인파가 늘어갔다. 날로 불어나고 있는 레저 붐을 탔던 것이다.
언론에서는 여가를 선용하려는 일반 대중의 심리 작용, 의상 및 용품 가격이 비교적 싼 가격이며, 한번 구입하면 장기간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 등 때문에 등산 및 레저산업이 계속 성장할 것으로 분석했다. 또한 선진 외국의 경우에는 국민소득 350달러 선을 기점으로 활발해지기 시작해, 500달러 선을 넘을 경우 고급화 경향이 나타나는 추세임도 곁들였다.
한국은 1974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 554달러라는 신기록을 작성했다. 중동전쟁이 부른 에너지 위기인 제1차 석유파동(Oil Shock) 속에서 이룬 결과였다. 제품가격 상승, 환율 불안정 등으로 대부분 업종에는 불황과 인플레이션이 만연한 상태였다.
그래도 성장을 거듭한 한국은 1977년에 1인당 GNI 1,034달러를 돌파하고, 1979년 1,676달러로 성장했다. 1978년 12월부터 시작된 제2차 석유파동과 1979~1980년의 정치적 격변기가 겹쳐 한국 경제는 크게 한번 흔들렸다. 소비자물가도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휘발유 가격이 1973년에 리터당 46원이었는데 1980년에는 538원으로 올랐다. 쌀값도 1973년에 80kg이 9,728원이었는데, 1980년에는 4만 7,663원으로 치솟았다.


<1970년대 북한산 샘터를 찾은 등산객>

 

그래도 성장을 거듭한 한국은 1977년에 1인당 GNI 1,034달러를 돌파하고, 1979년 1,676달러로 성장했다. 1978년 12월부터 시작된 제2차 석유파동과 1979~1980년의 정치적 격변기가 겹쳐 한국 경제는 크게 한번 흔들렸다. 소비자물가도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휘발유 가격이 1973년에 리터당 46원이었는데 1980년에는 538원으로 올랐다. 쌀값도 1973년에 80kg이 9,728원이었는데, 1980년에는 4만 7,663원으로 치솟았다.
이런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1981년부터 다시 상승하기 시작해 1984년에는 1인당 GNI 2,257달러를 기록했다. 1985년에는 보호무역주의가 세계 경제에 대두되면서 수출이 전년대비 최악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1986년부터 저유가, 저금리, 저환율의 이른바 ‘3저(三低) 현상’의 호황 바람이 불어왔다. 3년 연속으로 두 자리 수의 경제성장률 달성과 함께 1인당 GNI 신기록을 매년 경신했다. 1인당 GNI 2,000달러, 3,000달러, 4,000달러를 힘 있게 돌파했다. 마침내 1989년 5,418달러로 성큼 올라섰다. 이런 고도성장의 시대 때문에 레저산업은 큰 날개를 활짝 폈다.
언론에서는 등산 인구가 경제성장률을 앞질러 늘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급격한 등산 인구의 증가 추세로 등산용품 및 장비의 수요도 크게 늘어났다. 1976년에는 등산 인구가 200~300만 명에 이른다고 보도되었다. 또한 등산화와 등산복을 갖추는 것이 갈수록 일반화되어 갔다. 산에서 체온을 보호하고 운동화 대신 전문화된 신발을 착용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안전한 등반에 대한 의식도 점점 나아졌다. 한편, 1981년에는 등산 인구를 300만 명으로 추산했다.

대거 진출과 출혈 경쟁


국민 소득과 생활이 향상되면서 불어온 레저 붐으로 인해 레저 및 스포츠산업이 한껏 고무되었다. 그래서 대기업들이 하나둘씩 업계에 진출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1973년 7월 삼경물산(코오롱그룹의 모태인 회사)이 내놓은 ‘코오롱스포츠’ 브랜드는 대기업 진출의 첫발자국이었다. 1974년에는 코오롱상사가 ‘코오롱스토어’를 열었다.
대기업 진출이 본격화 된 것은 1978년부터였다. 선경(SK의 전신)이 ‘선경레포츠’란 브랜드로 진출했으며, 태평양개발(태평양그룹의 방계회사)도 텐트 및 의류 등 일부 용품을 시판했다. 1979년에는 반도상사(LG상사의 전신)가 ‘반도스포츠’라는 브랜드를 내놓았다. 하지만 주춤한 수요 때문에 애를 먹었다.
1981년 9월에 한국이 88올림픽을 유치하자, 이제는 세계적인 스포츠 메이커들이 관심을 가지고 몰려들었다. 특수를 노리고 더 큰 덩치들이 몰려들었던 셈이다. 1980년 서독의 아디다스가 국내에 진출을 했다. 1981년 일본의 미즈노에 이어서, 미국의 나이키는 ‘기차표’ 고무신으로 유명했던 신발제조회사인 동양고무산업과 손잡고 화승나이키(화승의 전신)를 세우고 제품을 시판했다.
스포츠 붐과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은 한마디로 기회였다. 모든 국민이 스포츠에 열광하고 레저에 빠져드는 현상이 즐거웠던 셈이다. 제5공화국은 1982년 3월에 6개 구단으로 프로야구를 개막했고, 1983년 5월에 프로 2팀에 실업 3팀으로 프로축구 시대도 열었다.
1982년 이후, 시장 쟁탈전은 과열되어갔다. 국내 대기업은 거의 다 참여하게 되었다. 이제는 삼성그룹까지도 뛰어들었다. 제일합섬은 ‘엑셀’이란 상표로, 제일모직은 ‘골덴스포츠’란 상표로, 삼성물산은 ‘SS스포츠’란 상표로 뛰어들었다. 브랜드가 홍수를 이루는데 비해 등산용품 및 장비 판매량은 20~30% 정도 늘어난 실정이었다. 그리고 등산 파카(Parka)의 경우, 등산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캐주얼용으로도 겸할 수 있는 다목적 파카를 찾는 소비 트렌드가 점차 늘었다.
푸마와 리복 등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는 대기업과 손잡거나 로열티를 받으면서 거의 다 한국에 상륙했다. 이들은 전 세계에 판매망을 구축하고 수백 종의 스포츠용품을 생산하고 있는데, 그 첫 단계로 대량소비가 가능한 신발류와 의류를 우선 공략했다. 그리곤 등산용품, 낚시용품 등 전문상품으로 발을 넓혀가는 전략이었다.
세계적인 브랜드와 대기업들이 무분별하게 진출한 레저용품 및 스프츠용품 시장은 예상만큼의 폭발적인 수요가 나오지는 않았다. 1984년부터는 재고가 쌓여가면서 난전 상태를 빚었다. 시장 규모에 비해 재벌기업 등이 대거 진출했기 때문에 출혈 경쟁을 피할 수 없었다. 현대그룹만 제외하고 대기업은 사실상 모두 쟁탈전에 참여했다. 이 분야에서 손을 떼는 기업도 점차 나오기 시작했다. 오히려 전문기업들이 더 잘 버티면서 선방을 하는 형국이었다. 1986년에는 프로스펙스의 국제상사가 이제 신발뿐만 아니라, 50여 종의 등산장비를 내놓고 전국의 특약점을 통해 판매에 들어갔다. 1970년대 말에 약 100억 원 정도였던 시장이 1986년에 이르러 약 600억 원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88서울올림픽이 끝나고 난 뒤, 대기업들은 리조트나 골프장 등 시설 투자로 사업 다각화를 노렸고, 등산화와 텐트, 코펠, 버너 등의 전문용품 시장에도 전면적으로 뛰어들었다. 코오롱, 삼성물산, 선경스포츠 등은 더욱 의욕적으로 가세했다. 뒤이어 브랜드로 명성을 쌓은 아디다스, 아식스, 퓨마, 미즈노, 하이파이브 등도 등산용품 시장에 진출했다. 그동안 전문업체로 꾸준히 성장해온 동진산악은 동진등산장비총판으로 거듭나 분투했으며, ‘쟈칼’ 브랜드의 대준물산, K2상사, 한라스포츠 등은 대기업 및 외국 유명 상표와 일전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89년에 1,000억 원대 가까이 성장한 시장은 춘추전국시대가 되었다.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사라지는 브랜드와 새롭게 나타나는 브랜드로 혼미한 상태에 빠졌다.

<동진등산장비총판 시절 매장>

양과 질, 함께 성장


살림살이가 계속 나아지면서 관광과 레저 인구는 해마다 늘어났다. 이런 반면에 그늘도 진하게 졌다. 산악계는 안전의식 부족으로 인한 사고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락 질서 등의 문제점을 보였다. 등산을 단순히 먹고 마시고 떠드는 행동으로 몰아가거나 산에 대한 두려움 없이 무모하게 만용을 부리는 일이 잦았다.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와 쓰레기, 꽃이나 나뭇가지 꺾기, 바위에 이름 새기기, 녹음기를 틀고 디스코 춤을 추거나 고성방가하기, 음주가무 등으로 산이 시장판처럼 변해버렸다. 설악산의 에델바이스, 한라산의 풍란과 한란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자연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교육이 절실했다. 복잡한 생활에서 벗어나 산을 찾고, 공해를 피해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건강을 다지면서 답답하고 피로한 심신을 달래주는 등산 본연에 대한 의식 전환이 필요했다. 특히 전문 산악인들은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산악인들은 실천에 나섰다. 그 움직임은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주로 환경보전 운동을 적극적으로 실행했다. 1975년부터 서울시산악연맹 등 산악단체의 이름으로 도봉산 등에서 나무심기 행사를 개최했다. 1976년부터는 식목일 전후에 나무를 심었다. 수백 명이 산에 올라 정성으로 나무를 심는 것은 산을 아끼는 마음의 실천이었다. 헐벗은 산을 푸르게 가꾸겠다는 전 국민적인 행사이기도 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잣나무와 밤나무 등의 유실수를 주로 심었다.
특히, 1976년 11월에는 산악 환경 정화 작업도 벌였다. ‘산 쓰레기 삽니다’라는 이색적인 행사였다. 산행을 즐기는 인구가 나날이 늘어가고 있는데, 환경보전에 대한 인식은 너무나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산에 가는 일을 먹고 마시고 노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주말이면 산은 쓰레기로 몸살을 앓았으며, 심지어 나무로 불을 피우는 사람들까지도 있었다.
산악인들은 안타까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쓰레기 수거에 적극 나섰던 것이다. 등산로와 계곡 등에 널려진 깡통, 빈병, 휴지 등을 빈 자루에 주워 담아 하산했다. 부피와 무게에 따라 최고 중량상, 최고 부피상 등도 시상했다. 이 덕분에 트럭 4대 분이 단번에 수거되었으며, 쓰레기를 판매한 대금으로 다시 불우이웃돕기 기금으로 내놓는 선행을 펼쳤다.

<한국산악회회원들의 도봉산 정화운동>

정부도 산악인들의 산 쓰레기 수거 운동에 자극받아 1978년 10월 자연보호헌장을 선포했다. 자연보호와 자연환경에 대한 국민적 결의와 의무 등을 수록했으며 국민적 각성을 촉구했다. 1979년부터 각급 학교의 교과서 및 각종 정부간행물에 자연보호헌장을 게재하기로 했다.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의 혜택 속에서 살고 자연으로 돌아간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이 속의 온갖 것들이 우리 모두의 삶의 자원이다. (이하 생략)”
- 자연보호헌장 전문 중에서


한편, 알피니즘의 아카데미인 한국등산학교가 1974년 6월에 도봉산장에서 개교를 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된 상설 등산학교는 소속 산악단체에 관계없이 운영되었다. 최고의 운영진과 강사진을 구성해 산악교육을 하자는 취지였는데, 재정 문제 등으로 말미암아 1984년에 서울시산악연맹으로 이관되었다. 한국등산학교는 6~8주 동안 초급반, 암벽반, 동계반 등을 각각 운영하면서 이론과 실기 교육을 병행했다. 이곳을 통해서 많은 산악인들이 배출되었다.
한참 뒤인 1987년 5월에는 한국산악연수원이 오픈했다. 한국등산학교 교육이 기술등반 위주였기에, 보다 다양한 계층에게 산악활동과 산악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세워졌다. 다양한 주제발표와 토론회도 개최되었다. 이는 산악문화에 새로운 시도이자 새로운 바람이었다. 청소년 산악체험학교, 교직자 산악직무연수, 산악초청 강연회 등을 통해 산악연수원으로서의 기능을 해나갔다. 이처럼 한국의 산악계는 양적, 질적 성장을 거듭하면서 보다 다양한 활동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던 셈이다.

<한국등산학교 도봉산장 천막 강의장에서 강의를 마치고>

 

한계로의 도전과 집념


한국 산악계는 히말라야에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실패를 딛고 결연히 일어선 아름다운 도전은 그칠 줄을 몰랐다. 1974년 1월부터 대한산악연맹은 에베레스트 원정 훈련을 실시했다. 1977년에 원정을 목표로 세우고 전국에서 선발된 37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적설기 기술 습득 등을 차분하게 해나갔다.

당시 한국보다 앞섰던 일본은 이번엔 여성들이 일을 냈다. 일본 여성원정대는 1974년 5월에 여성 최초로 8,000m 등정을 일궈냈다. 나카세고, 우치다, 모리가 마나슬루(Manaslu, 8,163m)에 올랐다. 마나슬루는 1956년에 일본이 초등정의 기록을 세운 봉우리였다. 그리고 일본의 히말라야 조사대는 답사 중에 히말라야 설인의 발자국 사진을 찍었다고 주장해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히말라야에는 작은 설인 메티(Meti)와 거인 설인 예티(Yeti)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왔다.
산천이 수려한 금수강산에서 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 산과 더불어 살아가는 민족으로서 또다시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산을 통해 호연지기를 길러온 산악인의 정신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또한 일반 대중들은 남녀노소 산에 오르길 즐기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산과 함께 하였다. 등산은 국민의 여가선용에 지대한 역할을 해나갔다. 특히 청소년과 청년들은 등산을 통해 건전한 정신과 체력을 키우며 개척과 모험의 정신을 배웠다. 그리고 자연의 위대함을 깨달으면서 국토 및 자연 사랑의 정신과 기상을 가졌다.
1975년에는 봉화산 구곡폭포와 설악산 형제폭포의 초등이 성공하면서 빙벽 등반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으며, 다음 해에는 선인봉에 너트만을 사용해 완등을 하는 기록이 세워져 클린클라이밍(Clean Climbing)의 열풍도 일어났다. 하지만 1976년 2월에는 대한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 원정등반대가 설악산에서 눈사태를 만나 3명이 숨지는 불상사를 겪었다. 세계의 지붕에 오르려는 불같은 의지와 꿈은 또다시 폭설에 묻혔다. 피눈물 나는 훈련과 희생을 치르면서 에베레스트 정상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증명했다.
1977년 9월 15일 12시 50분, 드디어 한국 최초의 에베레스트(Mt. Everest, 8,848m) 등정이 이뤄졌다. 1차에 실패한 뒤, 2차 공격조인 고상돈 대원이 셰르파 1명과 함께 정상에 올라 태극기를 꽂았다. 이름 하여 ‘77에베레스트원정대’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고상돈 대원은 무전기를 꺼내들어 “여기가 정상,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다.”라고 말하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곤 설악산 훈련 때 숨진 3명의 대원 사진을 정상에 묻었다. 마침내 세계의 지붕에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의지와 집념을 심고야 말았다.

<1977년 고상돈 대원 한국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

이로써 한국은 세계 8번째로 에베레스트 등정 국가가 되었으며 아시아에서는 4번째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고상돈 대원은 58번째 등정자가 되었다. 77에베레스트원정대는 이 과정에서 박상렬 대원이 8,700m 고도에서 비바크(Biwak) 기록도 세웠는데, 한동안 깨지지 않는 진기록이었다.
3,800m 고지에 있는 유일한 호텔인 에베레스트 뷰호텔에 도착한 원정대는 대통령이 보내준 축전을 전달받았다. 국내에 돌아오자 매스컴이 뜨거웠고 국민들은 뜨겁게 환영했다. 원정대는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펼쳤으며 온 나라가 감동으로 들썩였다. 그렇게 에베레스트는 특별했다. 귀국 인터뷰에서 어느 기자는 고상돈 대원에게 재밌는 질문을 했다.


“하늘의 끝이 있다고 믿는가요?”
“끝이 없다고 믿습니다.”
“하늘에 끝이 있다면 올라가겠습니까?”
그는 씨익 웃었다.

<한국 최초 에베레스트 원정대 환영 카퍼레이드>

1977년 10월 11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귀국신고를 받았다. “에베레스트 정복은 한국인 의지의 표상”이라고 치하하며, 대원 18명 전원에게 체육훈장을 주었다. 이때부터 산악인이 국가 훈장을 받는 효시가 되었다. 또한 박 대통령은 “등반기록은 등반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만든다기보다 앞으로 등반할 사람들을 위한 좋은 자료가 되므로 정확하고 자세하게 기록을 남겨두시오.”라고 말했다.
대한산악연맹 회장이었던 김영도 대장은 “사용한 등반장비의 40% 정도가 국산 장비이고 또 성능이 좋았습니다. 알루미늄 사다리는 무겁긴 했지만 문제없이 100개를 사용했고, 로프는 1만m를 갖고 가서 4,000m를 깔았는데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국산 장비도 많이 좋아졌던 것이다.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 등산 인구가 많이 느는 것은 좋은 일이나, 전문적으로 산을 오르는 사람은 산을 무척 아끼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유흥 기분으로 자연을 해치기 쉬우니만큼 지금부터 서둘러 범국민적인 자연보호운동을 벌여야 합니다.”라고 밝혔다. 이 발언은 자연보호헌장이 태어나는 계기였다.
77에베레스트원정대의 성공은 히말라야 붐을 거세게 몰고 왔다. 이후 한국의 히말라야 도전 러시는 크게 늘어났고, 등산장비 메이커들은 유명 산악인의 등반 활동을 적극 지원함과 동시에 광고 모델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총 6차례의 원정이 있었는데, 1980년대에는 원정이 무려 93회나 되었다.
1978년에는 한국산악회 원정대가 안나푸르나 Ⅳ봉(Annapurna, 7,525m) 등정에 성공했으며, 한국북극탐험대가 조직되어 최초로 북극권에 도전해 북위 80도까지 도달하기도 했다.
그런데 1979년 5월, 북아메리카의 최고봉 매킨리(Mount McKinley, 6,194m)에 등정한 고상돈 대원이 하산 도중 추락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산악인들은 물론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정부는 이 사고 직후에 「 해외원정등반 규제조치」를 발표했다. 최고의 등반 실력자도 죽는데, 실력이 못 미치는 다른 산악인들은 매우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결국에 「 산악관계 해외여행 추천심사규정」이 제정되었다. 추천과 사전 심사, 귀국 보고 의무화 등이 주요 골자였다. 이러한 규제는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때까지 존속되었다.
1979년 7월 한국의 산악인은 유럽 알프스의 아이거(Eiger, 3,970m) 북벽에도 올랐다. 1980년에는 8,000m급 두 번째 등정을 단일 산악회가 해냈다. 이번에는 마나슬루였다. 1981년 8월 정부는 일부 조치가 덜 풀렸지만,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를 취해 일반 관광은 물론 해외 원정 활동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1982년 5월에는 최초의 여성 원정대가 히말라야로 떠나 6,000m급을 등정했으며, 같은 달에 허영호는 마칼루(Makalu, 8,463m) 등정에 성공하고, 1983년에 마나슬루 단독 등정도 이루었다. 1986년 8월에는 대한산악연맹의 원정대가 K2(8,611m)를 등정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한국인의 강한 의지와 기개를 보여준 것을 온 국민과 함께 기뻐하며’라는 내용의 축전을 보내주었다. 1987년 12월 22일에는 허영호가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에 성공했다. 동계등반 역사에 있어서 4번째 쾌거였다.
1988년 10월에는 대한산악연맹의 원정대가 세계의 지붕 에베레스트와 로체(Lhotse, 8,516m) 2개 봉우리를 연속으로 등정했다. 최초의 8,000m급 연속 등정의 대기록은 88서울올림픽 폐막의 선물이었다. 김창선, 엄홍길 대원은 에베레스트에 세 번째로 오른 쾌거를 이루었으며, 로체에는 대원 3명이 정상을 밟았다. 뒤이어 11월에는 다울라기리 Ⅰ봉(Dhaulagiri, 8,167m)도 한국 산악인에 의해 정복되었다. 히말라야를 비롯한 여러 자이언트급 봉우리에 한국인의 기상이 깊게 새겨졌으며, 이제 세계 선진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선두그룹에 다가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