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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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YAK HISTORY

산악인과 함께한 40년간의 끊임없는 도전, 히말라야를 넘어 세계로

전국구 총판의 길

백지어음을 손에 쥐다

1979년 10·26 사건이 벌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면서 유신체제가 무너지고 한국 사회는 깊은 혼란 속에 빠졌다. 단풍철에도 등산객의 발길이 뚝 끊겼다. 1980년이 되어도 한국 사회는 혼란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 이후, 시퍼런 계엄령과 대학생들의 시위 등으로 세상이 갈수록 어수선했다. 봄철에도 등산객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주변에 많은 업체들이 둘 중에 하나 꼴로 문을 닫는 일이 벌어졌다. 동진산악은 끈기와 인내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12·12 군사 반란>


이렇게 세상이 갈수록 어수선했지만 동진산악의 구성원들은 모두 생업에 열중했다. 전국적으로 대학생들이 연일 가두시위를 벌였는데, 쉽게 사그라질 기세가 아니었다. 마침내 5월 17일에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정치활동 금지령과 휴교령까지 내려졌다.
바로 이날, 강태선 사장은 광주에 있었다. 도청 바로 앞에 있는 빅토리아체육사 손 사장은 그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강 사장, 여기 더 있지 말고 서울로 빨리 올라가세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잘못되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어서 빨리.”
강태선 사장은 자꾸 머뭇거렸다. 눈치가 빠른 손 사장은 다시 안으로 그를 불렀다. 그러더니 어음을 꺼내들었다. 어음 한 권이 총 20장인데, 그는 도장을 전부 찍더니 그 중에서 10장을 건네주었다.
“돈 때문에 못가는 것 같은데, 이것으로 우선 돌려쓰라고.”
강태선 사장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어음 10장에는 모두 금액이 적히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금액을 쓰지 않으셨는데요.”
“우선 필요한 데 융통을 하고, 제날짜에 문제 생기지 않게 막아주세요. 실수하지 않으면 되잖아. 그럼 됐지.”
강태선 사장은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나쁜 마음을 먹거나 또는 문제를 일으키면, 부도가 나는 곳은 동진산악이 아니라 바로 빅토리아체육사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금액을 적지 않은 채로 말이다. 상대방이 알아서 금액을 쓰라고 맡긴셈이었다. 말 그대로 백지어음을 손에 쥔 그는 순간 멍한 상태였다.
“지금 바로 올라가세요. 광주에 더 있으면 안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강태선 사장은 저만치 멀어진 상태에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손 사장의 걱정해주던 눈빛이 자꾸 앞에 아른거렸다. 강태선 사장은 전주를 들러 수금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올라오는 내내 광주가 걱정되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 있다니, 역시 대단한 분이야.“
강태선 사장은 제 자식에게도 이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깊은 감동을 주는 믿음에 보답하는 길은, 오로지 사업을 더욱 열심히 해서 내가 베풀 수 있을 만큼 성장하는 길뿐이라고 마음먹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백지어음을 그는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광주에 아무런 탈이 나지 않길 기원했다.

광주여, 굶지는 말아라

강태선 사장은 빅토리아체육사의 손 사장과 헤어지던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광주에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어 근심과 걱정으로 한숨이 절로 나왔다. 5월 21일 계엄사의 첫 공식발표 이후, 광주 소요는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광주의 모든 거래처가 부디 안전하길 빌었다. 그는 살며시 백지어음을 꺼내보았다. ‘허맹자’라고 찍힌 빨간 도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허맹자 여사는 손 사장의 부인이었다. 빅토리아체육사의 대표 명의가 그렇게 되어있었다.



<광주민주화 항쟁>


광주는 갈수록 심각한 지경이 되었다. 생필품 공급도 중단되고, 식품도 부족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강태선 사장은 나를 도와준 사람이 굶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퍼뜩 직원을 불렀다.
“왕십리 나가서 쌀을 사다가 용달차를 불러서 광주로 보내주게.”
얼마 후, 나갔던 직원은 용달차에 쌀 12가마니를 싣고 돌아왔다.
“용달차 기사가 광주까지 어떻게 가냐고 해서 데려왔습니다.”
“기사님, 그럼 그 부근까지는 아무 문제없겠죠?”
“네, 어디요?”
“그럼, 순창. 거긴 어때요?”

강태선 사장은 순창의 서울체육사에 전화를 넣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지금, 여기서 쌀을 보낼 테니 광주의 빅토리아체육사로 대신 보내줄 수 있겠어요?”
다행스럽게도 어찌 한번 시도해 보겠다는 답을 얻었다. 3일 뒤에 순창에서 연락이 왔다. 쌀을 어렵게 광주 안으로 집어넣었다고 했다. 그날 밤 강태선 사장은 편안하게 잠을 청했다. 그나마 시름을 덜었다.
한참 뒤에 광주와는 연락이 재개되었다. 한편, 빅토리아체육사의 손 사장은 그 쌀을 혼자 먹지 않고 광주지역 체육사에 골고루 나눠주었다. “이 쌀은 서울에서 어렵게 내려온 것이다. 동진산악의 강태선 사장이 난리 통에 우릴 걱정해서 보내주었다.”
이 덕분에 광주지역 체육사는 동진산악과 끈끈한 유대관계를 계속 유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동진산악이 승승장구하도록 항상 우군이 되어주었다. 특히, 손 사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백지어음을 내주었고, 보내준 쌀로 홍보의 첨병 역할까지 해주었다. 베풀어준 은혜에 작은 보답을 했을 뿐인데, 또 다른 은혜를 입게 된 강태선 사장은 고마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살아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편, 정부는 1980년 12월 1일부터 컬러텔레비전 시험방송을 개시하면서 총천연색의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강태선 사장은 집에 있는 TV는 그냥 놔두고, 컬러TV 한 대를 사서 광주 빅토리아체육사로 보냈다. 그 고마움에 대한 아름다운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나중에는 자동차까지도 광주로 보내주었다. 무한한 신뢰에 대한 보답, 두 사람의 관계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초월했다.

미드웨이 항공모함

1980년 6월 초, 동진산악은 역시나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강태선 사장이 지방에 출장 나갔을 때였다. 때마침 직원인 이철남은 도매상들을 다니다 우연히 닭털 침낭이 아주 싸게 나온 것을 발견하곤 모조리 사들였다. 침낭 제품이 부족해 제대로 팔지를 못하는 사정이라 크게 질렀던 것이다.
나중에 이를 안 강태선 사장은 걱정이 앞섰다. 많아도 너무 많아서 소화하기가 만만치 않아 어떻게 팔 것인지 고민이 되었다. 이철남은 일이 과했나 싶어 스스로 의기소침해졌다.
6월 17일, 이철남은 신문을 보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부산에 온 바다의 요새 - 미드웨이호 내일 입항”


<1980년 미드웨이호 입항기사>


미국의 항공모함이 입항을 한다는 기사였다. 미드웨이에는 승무원이 4,500명이나 되고, 배 안에는 신문사 2개와 방송국까지 있다고 한다. 미군들이 배에서 나오면 필요한 제품이나 선물 등을 사갈 텐데 싶었다. 이철남은 강태선 사장에게 신문을 건네면서 말했다.
“닭털 침낭을 부산 국제시장에 가서 모두 팔고 오겠습니다. 그곳에서도 이런 제품을 갖춰놓고 팔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잘 설명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이철남은 닭털 침낭을 가득 싣고 급히 부산으로 향했다. 나중에 서울로 돌아온 그는 빈손으로 가볍게 왔다. 가져갔던 침낭을 모두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강태선 사장은 닭털 침낭이 그대로 일까봐 내심 걱정이었는데 다행히도 하늘이 도왔다.
어느새 동진산악은 직원마저도 배포가 사장을 닮아갔다. 그리고 기막힌 기지를 발휘하는 것도 서로 닮아갔다. 남들은 동진산악이 항상 운이 좋아 장사가 잘된다고 하였는데, 실상은 운으로 치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항상 신속하게 행동하고 정확하게 앞뒤를 재면서 서로 협동하는 조직이었다. 아니 조직을 뛰어넘는 끈끈한 ‘한 가족’이었다. 어느 날, 강태선 사장은 동진산악의 사훈을 마련했는데, ‘신속, 정확, 협동’으로 정했다.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해야 고객이 만족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같이 협동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한편, 동진산악의 종로5가 공장시대는 마감을 하게 되었다. 강태선 사장은 집을 사근동으로 옮기면서 공장까지 한 건물로 이사를 시켰다. 1~2층은 공장으로 사용했고, 집은 3층이었다. 직원도 수십 명이 넘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약 50명 정도까지로 불어났다. 역시 숙식을 같이 해결하는 직원들도 많았다. 강 사장의 부인인 김희월 여사는 동진산악을 위한 내조에 더욱 공을 들이게 되었다. 이제는 힘에 붙여 집에서도 일을 돕는 여성까지 한 명 들여놓았다.

동진등산장비총판으로 거듭나다

1982년 1월 5일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해방 이후 약 37년 동안 실시된 통행금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통행금지는 1945년 9월 7일 맥아더 태평양최고사령관의 「 군정포고령 제1호」로 시작되었는데, 제5공화국은 자유개방 체제와 자율 개혁의지를 국민에게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제도 폐지에 나섰다. 사회 안정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으며,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선진형 사회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교복과 두발도 자율화시키기로 했다. 이제 학생들은 스스로 마음에 맞는 옷을 선택해 입을 수 있는 개성시대가 열렸다.
한편, 동진산악은 등산장비 전문업체로서 이미지를 보다 강화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1982년 3월 동진산악은 ‘동진등산장비총판’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또한 등산객이 원하는 모든 장비를 제대로 갖추었고, 전문 산악인을 위한 전문장비도 더욱 늘렸다. 동진등산장비총판으로 간판을 바꾼 뒤부터 매출이 크게 신장되었다. 이는 통금 해제의 영향도 제법 컸다. 이제 사람들이 야간산행과 새벽산행 등도 즐기게 되었다. 따라서 등산 인구와 등반 횟수가 자연스럽게 늘었다. 1979~1980년의 힘들던 시기에 주변의 경쟁업체들이 많이 사라진 것도 여러모로 보탬이 되었다. 한 마디로 등산화건, 배낭이건, 모양만 갖추면 무조건 팔릴 정도였다.
힘든 시기를 어렵게 버텨낸 일이 밝은 빛을 보게 해주었다. 하지만 새로운 경쟁자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번 경쟁자들은 골리앗이었다. 대기업들이 재벌의 힘으로 발을 내딛었으며, 세계적인 브랜드들이 한국에 속속 상륙했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대단한 특수를 노렸던 것이다. 과거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을 통해서 아식스와 미즈노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우는 성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기업들도 이런 목표와 전략을 짜면서 원대한 포부를 가졌던 셈이다.
이제 동진등산장비총판은 코오롱그룹, 선경그룹, 럭키그룹, 삼성그룹 등의 연이은 진출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각 전문업체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강태선 사장은 제품으로 승부하고 품질로 살아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과다 출혈 경쟁으로 들어가 제품 가격의 인상 요인도 스스로 감내해야만 했다. 그리고 마케팅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다.


<1982년 4월 최초의 동진광고>

동진등산장비총판을 더욱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1982년 4월, 동진등산장비총판은 산악전문지인 <월간 산>에 광고를 집행했다. 동진등산장비총판의 잡지 광고는 상당히 파격적인 형태로 주목을 끌었다. 만화로 광고지면 전체를 가득 채웠던 것이다. ‘악돌이(岳突이)’라는 만화를 1970년부터 연재해온 박영래 만화가의 작품이었다.
“앞에 가는 산악인 뒤에 오는 산악인 모두들 자이언트 배낭이로군.”, “동진 등산화를 신었더니 하산이 저절로 되네.”, “자이언트 배낭은 이렇게 큰 것부터”, “어린이용까지 종류가 다양하지요.”, “봄꽃이 봄산을 휩쓸 듯 자이언트 배낭이 한국의 산을 휩쓰는군.”, “나도 진작 동진 텐트를 사는 건데, 아이고 배야~.”
이렇게 해학과 유머가 넘치는 만화광고는 그 독특함으로 동진등산장비총판의 인지도 상승에 기여했다. 광고를 만들어준 박영래 만화가는 마당발 산악인이기도 했다. 강태선 사장은 평소에 쌓은 친분으로 광고 제작을 의뢰했고, 그는 흔쾌히 받아주었다. 평소에 훈훈한 술자리를 좋아하는 그는 제작비도 크게 요구하지 않으면서 함께하는 술자리로 족하다고 했다.
그의 만화는 다른 만화들과 달리, 산이나 등산을 단순 여가 활동이나 취미 정도로 표현하지 않았다. 알피니즘 본질에 접근해 ‘산꾼’들의 정서를 적절하게 표현해 많은 독자를 확보했다. 그는 산악계의 비윤리적인 행태나 잘못된 관행,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풍토, 허세와 권위의식, 전시성의 등정 지상주의 등을 철저하게 비판해왔으며, 산악계의 구조적인 모순과 문제점 등을 제기해 항상 자성의 기회를 주었다. 그래서 단명한 다른 만화와 달리 몇십 년 동안 연재되면서 장수를 누렸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86년 4월, 동진등산장비총판의 만화광고가 중단된 지 제법 되자 이와 거의 유사한 광고가 등산전문잡지에 등장했다. 종로5가에 같이 있었던 경쟁업체인 동명산악이 광고를 표절해 게재했다. 해학과 유머가 넘치는 동진등산장비총판의 만화광고가 많이 탐나는 아이디어였던 셈이다.

거봉, 자이언트가 만나다

1980년 가을, 강태선 사장은 설악산 대청봉 산장에서 산꾼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동안 안면이 있었던 제주도 고향 선배인 홍종철 씨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곤, 동행들에게 인사를 시켜주었다.
“이제 삼십을 갓 넘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등산장비를 열심히 만들어 산악인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계시는 분입니다. 바로 종로에 있는 동진등산장비총판의 사장입니다. 이런 젊은 사람이 많아야 산악계가 많이 발전하지 않겠습니까.”
반갑게 인사를 나눈 그들은 거봉산악회 회원이었다. 홍영길 등 다른 산악인들을 소개해 주었다. 곧 그들은 산악회 입회 이야기를 꺼냈다. 거봉산악회는 1980년에 몇몇 발기인들이 모여 창립된 상태로 멤버 영입 및 강화에 힘쓰는 초창기 시기였다.

<거봉산악회 산제>


쟁쟁한 멤버로 이뤄진 거봉산악회는 일반적인 산악회와 다른 멤버들로 구성되었다. 당시에는 유명인이 아니었지만, 엄홍길도 발기인 중의 한 명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갓 스물을 넘은 막내 격이었다. 재정적으로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회장 자리는 공석이었고, 장재순이 부회장, 홍영길이 산악대장, 엄홍길이 등반대장이었다. 거봉산악회는 일반적인 산악회와 달리 고산 등반 활동을 추구하는 알피니스트 모임이었다. 즉, 히말라야에 오르길 꿈꾸는 전문적인 등반가 단체였다. 강태선 사장은 해외 원정이라는 말에 눈동자가 빛났다.
“거봉산악회, 이름도 너무 멋집니다. 지금 제가 자이언트 상표로 장사를 하는데, 거봉도 자이언트 피크, 뭐 이런 말 아닙니까. 이건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꼭 운명인 것 같네요. 저도 한라산을 수없이 오르면서 히말라야에 한번 가보고 싶은 열망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날, 서로 의기가 투합되면서 강태선 사장은 거봉산악회에 입회하였다. 강태선 사장은 오랫동안 가져왔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히말라야가 한발 성큼 다가온 느낌이었다. 이날 이후, 동진등산장비총판은 고산 등반을 향한 산악인들에게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훈련이나 해외 원정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데, 형편이 가능하면 돕자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또한 거봉산악회의 국내 훈련은 물론이고, 고산 등반에 대한 기술 습득과 적응을 위해 해외 원정을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강태선 사장은 일본의 북알프스(Northern Alps)로 향했다. 히다산맥(飛山脈)은 일본 최고 높이의 산악지대였다. 3,000m 봉우리에 도전한 강태선 사장은 더욱 높은 곳을 찾게 되었다.

<암벽등반을 하고 있는 강태선 사장>


다음 목표는 몽블랑이었다. 유럽의 등산 역사가 숨 쉬는 곳이라 더욱 가보고 싶어졌다.
1983년 2월, 동진등산장비총판은 마침내 창업 10주년을 맞이했다. 2평짜리 매장에서 혼자 일군 사업은 한 칸 한 칸 늘려 어느새 네 칸을 합친 규모로 커졌다. 등산장비 공장도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개인적으로 고산 등반대를 목표로 한 거봉산악회 일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1983년 4월에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한국 산악계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대단한 이슈였다. 북한산 인수봉에서 20명이 조난을 당해 7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사고를 당한 피해자는 대부분 대학생이었는데 갑자기 일어난 기상이변으로 참변을 당했다. TV에서는 긴급뉴스를 내보냈다. 국민들의 이목은 구조작업에 집중되었다. 사람들은 자일에 매달려 죽어있는 장면과 울부짖는 유가족들의 절규에 큰 쇼크를 받았다. 사회를 강타한 이 사건은 경종을 크게 울리는 계기가 되었다. 구조 체제에 대한 문제점이 거론되었으며, 경찰구조대 창설로 연결되었다.
힘든 역경의 한 해였지만, 강태선 사장은 예정대로 몽블랑을 향했다. 1983년 9월 강태선 사장은 알프스의 최고봉인 몽블랑에 대원 4명과 함께 정상에 섰다. 히말라야 등반을 위한 고산 적응 훈련이었다. 그는 알피니즘의 역사가 시작된 현장을 직접 눈으로 살펴보았다. 이번 경험을 토대로 꿈에 그려왔던 히말라야에 반드시 오르겠다고 다짐했다. 몽블랑에 오른 그는 생각보다 감동적이지 않아 스스로 놀랐다. 그 이유는 한라산 때문이었다. 제주도 한라산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깨닫는 계기였다.

<거봉산악회 암벽등반훈련>


몽블랑을 다녀온 강태선 사장은 한라산에서 훈련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알프스보다 두 배나 더 높은 히말라야를 가기 위해서는 눈과 친숙해져야만 했다. 겨울의 한라산은 위험한 등반을 대비해 훈련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어린 시절부터 오르던 한라산이지만 혼자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이제는 히말라야를 꿈꾸는 거봉산악회의 유능한 대원들이 함께했다. 합동 러셀(Russel)로 헤쳐 나가면서 길을 만들어냈다. 매서운 바람 앞에서 체력 소모는 상당했다. 하얀 설인이 되어버린 그들은 고된 훈련을 감내하면서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강태선 사장은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와서도 산을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기에 대원들과 함께 하는 데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산을 마음의 스승으로 삼고 등산전문용품 사업을 경영해온 그의 꿈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불 앞에 선 동진

1983년 2월 12일 토요일, 당장 내일은 설날이었다. 동진등산장비총판의 직원들은 명절 대목 장사 때문에 그동안 바쁘게 지냈다. 점심때가 되어 강태선 사장은 모두 명절을 보내라며 퇴근시켰다. 문을 닫고, 이제 막 가려는 찰나에 아는 분을 만났다. 커피나 한잔하자는 제의에 근처 다방에 가서 앉았다. 잠시 후, 커피가 나와 잔을 들 때쯤에 밖이 소란스러웠다. 자세히 귀 기울여보니, “불이야!”라는 고함이었다.
깜짝 놀란 그는 뛰쳐나왔다. 그의 눈앞에는 무서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불기둥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자신의 매장 위치인 것만 같았다. 정신없이 달려가 보니 바로 옆 매장인 가방 부속가게 였다. 당시 동진등산장비총판 주위에는 쓰리세븐이나 고래가방 등 가방전문 매장이 많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난로를 피워놓은 상태에서 부족한 기름을 넣다가 불이 붙은 전형적인 인재였다.
강태선 사장은 급하게 현금과 장부를 챙겨서 뛰쳐나왔다. 때마침 소방차가 앞에 도착하는 모습을 보고 달려가 소방관과 함께 소방호스를 잡았다. 불은 세차게 옆 매장에서 이글거렸다. 마치 자신이 소방관인 양 호스를 부여잡고 직접 불을 끄기 시작했다. 주변의 상인들은 전부 난리법석이 났다. 저마다 현금과 장부를 먼저 챙기고 물건들을 밖으로 빼기에 바빴다. 평소에는 8명이 같이 옮겨도 무거웠던 진열장을 단 2명이 번쩍 들어 나르는 괴력들을 발휘했다. 애가 타지만 강태선 사장은 물건을 뺄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활활 불타고 있는 옆 매장을 보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바로 왼편의 불타는 매장은 가방점이 아니라 가방 장식을 취급하는 점포였다. 가방 장식은 버클 등 쇠붙이로 된 제품이 주를 이뤘다. 그래서 그런지 동진등산장비총판으로 불이 쉽게 옮겨지지는 않았다. 어느새 불은 뒤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다행이다 싶었는데, 갑자기 방향을 오른쪽으로 바꿔 다시 옆으로 불이 번졌다. 결국, 길 모서리에 위치한 동진등산장비총판은 양옆에 불을 둔 위태로운 형국이 되었다.
그때, 지휘관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소방대원들에게 더는 불이 번지지 않도록 양옆에서 가운데로 몰아 진화하자고 말을 꺼냈다. 즉, 동진등산장비총판으로 불을 한데 모아 태워버리면 진화된다는 뜻이었다. 이 말을 들은 강태선 사장은 눈물이 났다. 다행히도 소방관들은 매장을 지켜주면서 불을 진화해나갔다. 어느새 KBS 방송중계차도 나타났다. 이 장면은 TV로 전국에 고스란히 생중계되었다. 이제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주변 상인들도 물을 퍼서 나르고 호스로 물을 뿌리면서 합심했다. 마침내 불은 서서히 잡히고 점점 사그라져갔다.


<1980년 초 종로5가 동진등산장비총판 전경>


“12일 하오 2시 45분께 서울 종로구 종로5가 321의 22 가방도매상가에서

불이나 진화작업을 하던 중부소방서 소속 전병렬 소방사(27)가 천장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숨지고 충무로소방관파출소 소장 이영주

소방장(41) 등 4명도 중경상을 입었다.”
- 매일경제 1983년 2월 14일자 기사 중에서

명절 연휴에 닥친 화재사건은 상가에 큰 피해를 남겼다. 다행스럽게도 동진등산장비총판은 끝내 불타지 않았다. 열성을 다해서 진화하다 몸바친 소방관들이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런데도 동진등산장비총판은 아수라장이었다. 모든 제품에는 연기와 그을음 때문에 매캐하게 탄 냄새가 배버렸거나, 엄청난 물 폭탄을 받아서 못쓰게 되었다.
그렇게 미친 듯이 날뛰었는데도 불로 입은 피해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나중에 피해 보상을 받는 데 불리하게 작용했다. 화재보험을 들어놓은 상태였는데, 보험회사에서는 화재로 피해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보상이 어렵다는 기가 막힌 답변을 내놓았다. 강태선 사장은 보상금액이라고 하기에도 낯부끄러운 아주 적은 금액을 간신히 받아냈다. 지금과 같은 소비자 시대와 달리, 당시에는 고객에게 불리한 보험 약관이었다.
이 일로 동진등산장비총판은 큰 타격을 입었다. 명절 뒤에 정상적으로 영업하지 못한 날도 제법 되었으며, 강태선 사장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했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크게 홍보비를 벌었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KBS 생중계를 통해 동진등산장비총판의 간판이 내내 방송을 탔기 때문이란다. 가게 앞에 선 고객이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들어오게 해준 계기라고 좋게 사건을 평해주었다. 위로로 해준 말인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주변에서 안부를 묻는 전화가 불이 나도록 많이 왔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