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YAK HISTORY

산악인과 함께한 40년간의 끊임없는 도전, 히말라야를 넘어 세계로

날개를 단 동진

 보이스카우트로 날개를 달다


동진산악은 청소년 단체와 만나면서 큰 날개를 달게 되었으며, 동진등산장비총판으로 발전하는데 있어서도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 청소년 단체는 바로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지금은 한국스카우트연맹)이었다.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보이스카우트는 등산장비 업체에게도 마찬가지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또한 1970~1980년대에 보이스카우트는 대내외적으로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던 시기였다. 한국의 스카우트는 1922년에 창설된 조선소년군과 소년척후단이 그 뿌리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잠시 해산되기도 했지만, 8・15 광복과 더불어 재발족했다. 1950년대 대한소년단은 세계연맹 회원국으로 가입하면서 세계무대에 나섰다. 1966년에 대한소년단은 보이스카우트한국연맹으로 명칭을 바꿨으며, 1968년 사단법인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으로 재출발했다. 1969년에는 스카우트 육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게끔 되었다.

<보이스카우트 교육을 받은 강태선 사장>


법적으로 지원받게 된 스카우트 운동은 크게 활성화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청소년들이 건전한 생활과 바른 레크리에이션으로 다음 세대의 일꾼으로서 조국의 번영을 위해 앞장서게 되었다. 스카우트 운동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스카우트 방법에 의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키려는 목적을 지녔다. ‘일일일선(一日一善)’이라는 실천 강령에 따라 애국, 인격 도야(陶冶), 건강, 기능, 봉사의 훈육 목표 달성을 도모했다.
스카우트 활동에는 단복과 함께 다양한 등산 및 야영 장비와 용품이 반드시 필요했다. 1979년 이전에는 한국유니폼상사라는 곳에서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의 모든 용품을 독점했다. 독점 사업은 여러 폐해를 낳았다. 용품의 질이 갈수록 떨어지고 가격도 적당하지 않았다. 한국유니폼상사는 자기 멋대로 전국에 보이스카우트 대리점까지 개설해 운영했다. 시중에는 몰래 짝퉁으로 만들어진 보이스카우트 용품이 판을 치기도 했다. 결국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은 직영사업으로 전환을 시도하게 되었다.
1979년부터 직영사업을 시작하면서 등산전문업체인 한라스포츠가 지정을 받았다. 동진산악은 지정업체인 한라스포츠로부터 하청을 받는 곳 중에 하나였다. 비지정인 업체로서 납품을 했던 셈이다. 전국의 판매대리점도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에서 직접 지정을 다시 했다. 약 50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단원으로서 활동을 했으니, 대규모 물량을 지정받은 한라스포츠는 홀로 납품하기에 벅찼다.
그런데 진정서 파동이 벌어지고 말았다. 직영사업 전환으로 인해 기존의 영세업자들이 다 죽게 되었다고 정부에 진정을 냈던 것이다. 그동안 독점해온 업체가 스스로를 영세업자라고 표현한 것은 너무 과장된 사실이었다. 결국 비영리단체인 곳에서 영리사업을 직영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결론이 났다. 직영이 법적으로 문제가 있게 되자, 1980년부터 위탁대행이라는 방안이 나왔다.
굴지의 대기업인 제일합섬에서 위탁대행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삼성그룹 쪽에서는 의류만을 취급해 단복만을 공급할 수 있었다. 장비를 생산하지 않은 덕택에 여러 장비전문업체가 위탁대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동진산악과 함께 한라스포츠, 대원산악, 동명산악 등이 경쟁적으로 납품을 했다. 그 중에서 동진산악은 납품 규모 면에서 가장 후발주자였다.
한편, 1983년 11월에 재단법인 한국보이스카우트지원재단이 설립되었다. 스카우트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단체였다. 쌍용그룹의 김석원 회장이 이사장을 맡았으며, 금호그룹과 해태그룹, 두산산업 등 여러 재계 인사들이 참여했다. 이제 새로 설립된 지원재단이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의 용품과 장비를 직접 관리하게 되었다. 지원재단은 공식 장비대행업체를 뽑았는데, 대원산악과 동진만이 선정되었다. 1982년에 동진산악에서 동진등산장비총판으로 새롭게 거듭난 것도 어느 정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제는 기존보다 공급 물량이 대폭 늘어났다. 참으로 대단한 물량이 동진을 거쳐서 전국으로 뻗어나갔다. 동진등산장비총판은 이를 계기로 사세가 확장되어갔고, 종로5가에서는 비교 대상이 없어질 만큼 몰라보게 성장해나갔다. 결국 동대문에서도 동진과 겨룰 수 있는 경쟁업체가 거의 사라져갔다.
장비대행업체로서 유일하게 경쟁을 펼치던 대원산악도 약 3년 뒤에는 완전히 포기하고 말았다. 후발주자였던 동진등산장비총판에게 상품과 영업 측면에서 뒤쳐졌기 때문이다. 동진의 상품이 경쟁사보다 훨씬 좋아 학생들에게 인기였고, 따라서 판매대리점에도 크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물론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과 판매대리점 모두의 관계도 훨씬 탄탄했다.


청소년 곁의 동진


활발한 마케팅 활동으로 강태선 사장은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과 지정받은 판매대리점들을 누볐다.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귀를 열고 원하는 부분을 개선시켜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보이스카우트 물량은 동시에 전국적으로 깔려야 하기 때문에 짧은 기간 동안 사람도 많이 필요했다. 강태선 사장의 식구들도 총동원될 정도였다. 그의 아내인 김희월 여사도 거들어 수통을 케이스에 넣는 작업을 할 정도였다.


“동진은 대화의 채널이 잘 통했습니다.

이렇게 고쳐지면 더 좋겠다거나, 이렇게 하면 더 잘 팔리겠다는 등의

의견을 주면 딱 맞게 해주었죠.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들에 대한 생각이 지극했어요.

어떻게 보면 미래의 고객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다고 보아도 되겠지요.”
- 이희강 한국스카우트연맹 판매대리점 사장

 

동진등산장비총판은 아무리 한밤중이라도 판매대리점에서 물건을 보내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 보내주었다. 상대방 처지에서 항상 일을 진행시켰으며 불편한 점이 없도록 신속하게 조치를 취했다. 자고 일어나면 보이스카우트 대원이 수십 수백씩 늘어나던 시기라 공급 물량은 계속 늘어났다.
특히, 강태선 사장은 보이스카우트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사업이 출발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즉, 해당 단체를 잘 알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교육훈련에도 열심히 참가했다.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 생업을 못할지라도 열성적으로 임했다. 기본 훈련에서부터 상급 훈련(지금의 과정은 초급, 2급, 1급 등으로 나뉘어져 있음)까지 진급 과정을 모두 마쳤다. 이런 그의 자세를 보고 상호 신뢰는 더욱 단단해졌다.

<강태선 사장 보이스카우트 교육 훈련>


한편, 보이스카우트에 제품을 공급하던 동진등산장비총판은 한국청소년연맹에도 연이 닿았다. 1981년 3월에 설립된 한국청소년연맹은 청소년들에게 심신의 단련을 통해 올바른 국가관과 윤리관을 심어주고,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며, 세계로 뻗어가는 진취적 기상을 함양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로 제5공화국이 주도해 만들었다. 전적으로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는 형태였다. 문교부의 예산 배정이 늦게 편성되는 바람에 1982년 7월에 전 총무처 장관인 김용휴 총재가 취임하면서 정상 궤도에 올랐다. 초・중・고 학교별로 아람단(초), 누리단(중), 한별단(고) 등의 학생청소년단이 조직되었다. 학생청소년단에는 보이스카우트처럼 야영에 필요한 장비와 용품 등이 필요했다. 한국청소년연맹은 야영장비 대행업체로 동진등산장비총판을 선정했다. 보이스카우트에 납품하고 있는 실적과 제품, 사업 규모 등이 신뢰를 받았다. 이렇게 대규모 거래선을 계속 늘려가는 동진등산장비총판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는 형국이었다.

 

신뢰의 동진


1986년 등산용품에 진출한 대기업들은 많은 어려움에 봉착했다. 보다 전문성을 가진 중소기업 중심으로 다시 재편될 조짐이 보였다. 대기업들은 당초 목표했던 판매 계획에 차질을 빚으면서 서서히 퇴조하는 기운이 역력했다. 선발업체였던 코오롱의 경우도 판매 신장에 어려움을 겪자, 1986년 8월부터 ‘액티브(Activ)’라는 브랜드를 새롭게 내놓았다. 반도상사는 1984년에 럭키금성상사로 사명을 바꾸었지만 계속 사업이 부진했다.
한편, 대우도 ‘하이파이브(High Five)’라는 캐주얼의류 브랜드를 스포츠용 전문 상표로 1985년 1월에 바꾸었지만 뒤늦은 감이 있었다. 1986년에는 ‘스포츠・캐주얼의 새물결 - 하이파이브’로 대대적인 광고를 집행했다. 후발주자였던 대우는 의욕적으로 대리점 모집에 나섰으나 가맹점 확보가 부진했다. 1987년 봄 시즌을 준비하기 위해 대우는 텐트 제조업체를 물색했는데 동진등산장비총판과 연이 닿았다. 대기업들은 자체 생산은 하지 않으면서 하도급 형태로 등산용품을 구비했던 것이다. 대우에게는 동진등산장비총판의 제품 품질과 단가가 적합했다. 또한 동진의 공장에서는 배낭과 텐트의 대량 생산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
동진등산장비총판은 대우에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으로 텐트를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대기업으로부터 신뢰를 받았다는 생각에 뿌듯한 측면도 있었다. 대우와의 계약 건은 제법 덩치도 있는 규모였다.

<동진 자이언트 텐트>


동진등산장비총판은 1988년에 서울시산악연맹 산하의 한국등산학교와 한국산악연수원 후원업체로 선정되었다. 후원업체로 선정된 동진등산장비총판은 1989년부터 산악활동을 위한 교육과 산악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평소에 강태선 사장은 이러한 교육기관의 활약이 절실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후원을 결정했다. 산악계는 그동안 양과 질이 크게 발전했지만, 자연보호나 순수한 알피니즘 등에 있어서 아직 부족한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후배 양성에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 싶기도 했다.
강태선 사장은 1986년부터 서울시산악연맹 이사로 활동했기 때문에, 산악계에 힘을 보탤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당시 한국등산학교 교장은 서울시산악연맹의 권효섭 회장이 겸직을 했다. 강태선 사장은 순수하게 봉사 활동에 임하는 권효섭 회장을 마음속으로 존경해왔다. 그 뒷받침을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강태선 사장은 거봉산악회의 회장을 맡아 이끌면서 서울시산악연맹으로부터 이사 제의를 받았다. 최연소 이사로 활동하게 된 강태선 사장은 남모를 고충도 많이 겪었다. 장사치로 대하는 산악인들이 너무 많았다. 심하게 굴욕적인 언사나 모욕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이를 꿋꿋하게 참아냈다. 아무리 장돌뱅이라고 무시하고 놀려도, 패기 넘치는 거봉산악회의 수장으로서 말썽을 일으킬 수 없었다.
거봉산악회의 자부심은 정말 대단했다. 대원들이 모두 출중한 사람들이었으며, 젊은 산꾼인 엄홍길 대원은 한국등반대에 포함되어 에베레스트 동계 원정도 다녀왔다. 1986년 1월 엄홍길 대원이 7,700m 고지에서 강풍으로 인해 발길을 되돌렸지만, 거봉산악회의 명성은 출중했다.

<한국등반대에 거봉산악회 대표로 참가한 엄홍길 대원>

 

한편, 강태선 사장의 일과는 정말 빡빡했다. 도매상으로서 전국을 커버해야 하고, 보이스카우트와 학생청소년단, 그리고 서울시산악연맹 이사 활동 등을 겸해야 했다. 재정적으로도 지원 요청을 하는 곳도 갈수록 많아졌다. 등산 전문장비 및 용품에 대한 수많은 지원 요청을 모두 들어주기에 벅찰 정도였다. 각자에게는 작은 도움이라고 크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전부 모이면 상당한 규모가 되는 강태선 사장에게는 상당한 부담일 때도 많았다. 그래도 가급적 거절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1989년 어느 날, 동진등산장비총판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놀랍게도 치안본부(지금은 경찰청)였다. 경찰산악구조대와 경찰특공대 장비에 대한 문의였다. 치안본부는 1983년 4월 북한산 인수봉에서 많은 사람이 죽으면서 경찰산악구조대를 창설시켰다. 그런데 산악구조를 다니는 산악경찰이 조난을 당하는 웃지 못할 사고가 났던 것이다. 이에 대한 사건을 조사해보니 장비에 문제가 있었다. 등산전문장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건설 현장에 쓰이는 안전장비들이 섞여있었다. 치안본부는 대한산악연맹과 한국산악회에 질의 및 추천을 의뢰했다. 건설 안전장비와 등산 안전장비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알게 되었으며, 두 단체로부터 3군데씩 전문업체를 각각 추천받았다. 그런데 두 단체로부터 공통적으로 추천받은 곳이 바로 동진등산장비총판이었다. 동진은 경쟁업체들보다 더욱 높은 신뢰를 받았다. 경영자가 산악인이면서 동시에 서울시산악연맹 이사로서 일하고 있으며,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과 한국청소년연맹에도 납품을 하는 뛰어난 실적까지 돋보였다. 결국 동진등산장비총판의 제품 샘플들을 검토한 결과, 경찰산악구조대와 경찰특공대 장비 생산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경찰특공대 장비 납품>


경찰특공대는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개최 때문에 창설된 기구였다. 대테러 임무와 경호 및 안전을 책임지는 곳이었다. 강태선 사장은 특수한 분야에서 일을 하는 경찰에게 반드시 필요한 교육을 시켜야 된다고 제의했다. 그래서 한국등산학교에서 위탁교육을 받는 계기도 만들었다. 산악인들에게 배운 경찰특공대는 특수 임무에 맞도록 자체 매뉴얼을 차츰 개발해나갔다. 이후, 교육 효과가 좋다고 소문이 나서 로프 매듭이나 타는 법 등 산악교육은 대통령 경호실도 받았으며, 여러 특수기관에 조용히 납품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산사람으로서 믿을 수 있는 제품은 기본이다

1988년 8월 1일, 신문을 든 한 직원이 강태선 사장에게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가 펼쳐준 지면에는 반가운 소식이 적혀있었다.


“캠핑용 텐트 방수불량 많다.” - 시판중인 캠핑용 텐트는 튼튼하기는

하지만 방수상태가 대체로 불량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소비자보호원이 코오롱의 훠레스트 등 6개 업체의

4, 5인용 돔형 텐트에 대해 품질시험을 실시한 결과

봉제방법, 끝마무리, 원단강도 등은 모두 양호했으나

코오롱스포츠, 대준레포츠, 대화물산, 아리랑산맥 등

4개사 제품의 방수상태는 불량한 것으로 나타났다.
각 회사 제품별로 보면, 코오롱스포츠 제품(훠레스트)은 방수상태,

현대스포츠 제품(로얄돔)은 탈색 정도, 대준레포츠 제품(쟈칼)은

방수정도와 텐트바닥천의 인장강도, 대화물산 제품(스포가)은 방수정도,

아리랑산맥 제품(디럭스돔)은 방수정도와 말뚝의 굴절강도가 각각 불량했다.


“동진의 제품(조우니돔)만이 모든 시험항목에서 합격 판정을 받았다.”
- 경향신문 1988년 8월 1일자 기사 중에서


강태선 사장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빨리 가서 열심히 일이나 하라며 직원을 재촉해서 보냈다. 그는 산악인 중에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을 뿐이었다. 산사람이 산에서 안전하게 등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전문업체의 갈 길이라고 새삼 자신을 다독이는 기회였다. 신문에 좋은 평가가 나온 것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로지 제 갈 길을 묵묵히 가면 언젠가는 알아주는 법이라고 되뇌었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계속 좋은 제품을 만들자고 당부했다.
동진등산장비총판의 제품은 최고의 산악인들이 제일 먼저 검증을 했다. 거봉산악회 멤버들에게 제품을 주면 그들은 사용 후기를 상세하게 들려주었다. 전문 산악인들에게 필드테스트를 받은 셈이었다. 그렇게 얻은 정보는 제품 개선과 개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신뢰할 수 있는 품질은 그렇게 담보되고 있었다. 다른 업체는 대부분 경영자가 우선 산악인이 아니었고 필드테스트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게 다반사였다.

<현장에서 필드테스트하는 강태선 사장>


프로자이언트로 변신과 웅지 마련


동진등산장비총판은 ‘자이언트(GIANT)’라는 상표를 등록하는 데 있어서 여러 난관이 있었다. 1976년부터 상표를 달아 판매했지만, 이후 프로야구 팀의 이름으로 유명하게 널리 쓰였다. 이로 인해 1977년에 출범한 특허청은 상표출원을 쉽게 등록해주지 않았다. 뒤늦게 상표의 중요성을 깨닫고 1985년에 상표출원을 냈는데, 1987년 1월에야 등록이 되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상표출원을 했던 ‘제로 포인트(ZERO Point)’는 1986년에 등록되었다.
1985년 어느 날, 거봉산악회 산행 중에 대원들은 멋지게 비행하는 독수리 한 마리를 보았다. 여러 수리 종류 중에서 어떤 것인지 정확한 구별은 어려웠다. 어느 대원이 강태선 사장에게 독수리 문양을 자이언트 상표에 넣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냈다. 멤버들 역시 멋있겠다고 동의를 표했다. 한 회원이 도안을 해서 모두에게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바로 1983년부터 등산 배낭 전문업체를 경영하기 시작한 장재순 써미트 사장이었다. 그의 손에 의해 자이언트 BI(Brand Identity)가 새롭게 마련되었다. 심플한 독수리 모양이 위에 자리 잡고 자이언트 글씨가 아래에 새겨졌다. 이 상표는 1986년 4월에 출원 되었고 1987년 7월 등록됐다.
한편, 1982년에 프로야구단으로 출범한 ‘롯데 자이언츠(Giants)’는 동진의 ‘자이언트’와 법적으로 다투려고 했다. 아무리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이라지만, 먼저 사용한 자로서 억울했다. 야구 글러브 등 야구용품에서도 자이언트란 상표가 있기도 했다. 그리고 자이언트 등산 제품이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시장에 자리 잡지 않은 상태라 고민도 있었다. 소비자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는 대기업 제품의 진출도 갈수록 부담되었다. 1989년 7월 강태선 사장은 보다 고급의 상품으로 동진의 위상을 끌어올리기 위해 상표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상표출원을 했다. 업그레이드 된 상표는 바로 ‘프로자이언트(PRO - Giant)’였다. BI는 자이언트와 동일했으며, 하단에 자이언트 대신 프로자이언트가 새겨졌다.

<프로자이언트 시대선언 광고>


프로자이언트 상표를 새롭게 선보인 동진등산장비총판은 새로운 둥지를 마련하는 경사까지 겹쳤다. 강태선 사장은 1981년에 사근동에서 신사동으로 집을 옮겼다. 2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역시 이곳에서도 여러 직원들이 숙식을 해결했다. 이사한 지 무려 9년 만에 이 건물은 새롭게 태어났다. 자택에서 회사 건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50-17번지, 동진의 새로운 웅지(雄志)의 터전이 1989년 12월 16일 완성되었다. 이에 발맞춰 회사의 이름도 새롭게 논의되었다. 많은 기업들이 애용하고 있는 레포츠라는 단어를 써서 ‘㈜동진레포츠’로 바꾸고, 1989년 11~12월에는 잡지광고까지 집행했다. 이 단어는 레저와 스포츠라는 말을 붙인 합성어로 1978년에 선경이 ‘선경레포츠’라는 브랜드를 내놓으면서 국내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후 레포츠는 일반적인 단어로 점차 통용되어갔다. 동진레포츠는 법인으로서 준비단계에 들어갔는데, 강태선 사장은 보다 큰 뜻이 있어 불과 두 달 만에 회사이름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보았던 전문 체인 유통망 형태를 구상하면서 그 이름은 ㈜동진레저백화점으로 정해졌다.